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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이자 천주교 조선교구 2대 교구장.

개설

범세형은 앵베르(Imbert, Laurent Joseph Marie)의 한자식 표기이다. 1797년에 프랑스에서 태어난 앵베르는 1819년 12월 18일에 사제 서품을 받고 중국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중국으로 부임하기 전에 1821년 4월부터 1822년 1월까지 영국령 말레이시아 페낭의 칼리지 제너럴(College General)에서 강의를 맡았다.

1821년 시암(현 태국) 대목구장 에스프리 마리 조제프 플로랑(Esprit-Marie-Joseph Florens) 주교는 싱가포르에 천주교의 선교 거점을 마련하고자, 앵베르에게 싱가포르로 가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앵베르는 1821년 12월에 싱가포르에 도착해서, 현지 상황을 조사한 후 그곳에서 미사를 집전하였다.

1822년에 앵베르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통킹에서 2년간 머물렀으며, 중국에 도착한 이후에는 12년 동안 사천성에서 머물면서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천주교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이던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입국을 앞두고 갑자기 선종하자, 1836년 4월 26일에 앵베르는 천주교 조선교구 2대 교구장과 카프사(Capsa)의 명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1837년 5월에 조선인 천주교 신자의 도움을 받은 앵베르는 압록강을 건너서 조선으로 들어가서 전교 활동에 전념하였다. 1839년 8월에 조선 관헌에 잡힌 앵베르는 그해 9월 21일에 새남터에서 참수당하였다.

활동 사항

1837년 5월 14일에 앵베르는 조선으로 잠입하였으며, 5월 말에 한양에 당도하였다. 그는 최초로 조선 땅을 밟은 천주교회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이미 입국해 있었던 모방([羅伯多祿], Pierre Philibert Maubant) 신부, 샤스탕([鄭牙各伯], Jacques Honoré Chastan) 신부와 함께, 선교 및 천주교의 성사 집전을 실시하였다.

앵베르는 조선 정부의 탄압이 심해지자, 경기도 수원에서 신자 손경서의 집에서 숨어 지냈는데, 김여상이 밀고를 하자 신자들의 안전을 위해서 1839년 8월 10일에 조선 관헌에게 자수하였다.

한양으로 압송된 그는 조선 관헌으로부터 모방과 샤스탕 신부의 행방을 밝히라는 요구와 함께 가혹한 고문을 당하였다. 모방과 샤스탕 신부가 자수한다면,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이 피해를 입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앵베르는 모방과 샤스탕 신부에게 자수를 권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하였다. 결국 모방과 샤스탕 신부는 조선 관헌에 자수를 하였다. 앵베르 신부는 조선 관헌으로부터 천주교로 개종한 조선인들의 명단과 행방을 밝히라는 심문을 받았으며, 결국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참수당하였다.

묘소

앵베르의 유해는 참수형 이후 길에 약 20일 방치되었다가 조선인 천주교인에 의하여 노고산에 묻혔다. 1843년에 경기도 과천의 삼성산으로 이장되었으며, 1901년 지금의 명동 대성당의 지하실에 있는 그로토로 이장되었다.

상훈 및 추모

1925년, 교황 피우스(비오) 11세에 의하여 시복 추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성인 추대.

참고문헌

  • 아드리앙 로네, 폴 데통베 저, 안응렬 역, 『한국 순교자 103위 성인전』 하, 가톨릭출판사, 2013.
  • 한국가톨릭대사전 편찬위원회 저, 『한국 가톨릭 대사전』 6,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기해, 병오 박해 순교자 증언록: 시복재판기록』, 한국교회사연구소, 2004.
  • 김규성, 「19세기 전·중반기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 시도와 서해 해로: 1830~50년대를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32, 2015.
  • 파리외방전교회 아카이브, Numéro: 338, Laurent IMBERT (http://archives.mepasie.org/notices/notices-necrologiques/imbert-1796-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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