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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16 기준 최신판




일본 실정시대 전기의 영주.

개설

다다량(多多良)은 대내씨(大內氏)의 본성으로 대내씨는 백제 성왕의 왕자인 임성태자(琳聖太子)를 시조로 하였다. 실정(室町)시대 대내씨는 주방(周防)을 본거로 하는 서일본의 대표적인 영주가 되었다. 대내씨는 조선과의 통교시 ‘대내다다량(大內多多良)’을 명의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조선 문헌에 등장하는 다다량교홍·대내다다량교홍은 대내교홍(大內敎弘)을 가리켰다.

대내교홍의 아명은 육랑(六郎)·신개(新介)라고도 칭하였다. 관위는 좌경대부(左京大夫), 후에는 대선대부(大膳大夫)가 되었다. 대내씨 12대 당주대내지세(大內持世)의 양사자(養嗣子)였다. 11대 당주대내성견(大內盛見)의 아들이라고 하지만 대내씨 계도 등에는 지세의 동생인 대내지성(大內持盛)의 차남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도 지세의 조카라고 하였다.

내용 및 특징

1441년 가길(嘉吉)의 난으로 지세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주방(周防)·장문(長門)·풍전(豊前)의 수호(守護)가 되고 후에 축전(筑前)의 수호도 겸하였다. 본거인 산구(山口) 거리의 통금을 실시하거나 가신단 관련 법령을 내어 영국 지배를 공고히 하려 힘썼다. 조선과 명과의 통교에도 힘을 써 무역으로 큰 이익을 보았다. 가독을 계승한 초에는 막부의 명령에 따라 구주로 출진해 숙적인 소이씨(小貳氏) 토벌에 나섰다. 이후 구주에서 세력을 크게 확대해 기존의 4개국(國) 외에 안예(安藝)·석견(石見)·비전(肥前) 지역으로 영지를 넓혔다.

그러나 막부와의 관계는 순탄하지 않아 막부가 교홍에 대한 토벌령을 내리고 교홍의 대내씨의 당주 지위를 박탈하기도 하였다. 1463년 막부에서의 처분이 모두 취소되어 교홍의 지위는 다시 공인되었다. 이후 막부와의 관계는 평온을 유지하는 듯하였는데, 1465년 막부의 명을 받고 사국(四國: 시코쿠)의 하야통춘(河野通春) 토벌에 나섰는데, 사국으로 도해한 뒤 통춘과 손을 잡고 막부 측과 싸웠다. 전투에서는 우위를 보였으나 교홍은 전쟁터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활동 사항

대내교홍의 이름이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것은 1443년(세종 25) 통신사변효문(卞孝文)이 일본에서 돌아와 보고한 내용에서였다(『세종실록』 25년 10월 13일). 여기에서는 이름이 ‘대내교홍(大內敎弘)’이라고만 나오는데, 이때는 교홍이 가독을 이어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로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기 전이었다. 이를 계기로 같은 해 12월 사신을 파견해 왔는데 이때의 명의는 그 전대와 같이 ‘대내다다량교홍(大內多多良敎弘)’의 명의를 사용하였다(『세종실록』 25년 12월 11일). 그 이후에도 교홍에서 보내온 사신들은 ‘다다량교홍’의 명의로 파견되는 경우가 많았다. 교홍은 조선에 자주 사신을 파견하였고 조선과의 교역을 통하여 큰 부를 축적하였다. 대내씨는 조선의 왜구대책 등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고 대내씨 사신의 위치는 일본의 여러 통교자들 중 일본국왕사에 버금갈 정도로 조선에서도 중시하였다. 대내씨는 이 무렵 명과의 감합무역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있었다. 1461년(세조 7)에는 대내씨가 물소를 조선에 바쳤다는 기록이 있는데(『세조실록』 7년 10월 21일) 이를 통하여 대내씨가 조선과 일종의 중계무역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453년(단종 1)에는 대내씨가 선조로 삼는 임성태자(琳聖太子)와 관련된 기록을 조선 측에 요청하였는데(『단종실록』 1년 6월 24일) 조선의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이해 조선에서는 통신부(通信符)를 교홍에게 내려 주었다. 현재 일본의 모리가(毛利家) 박물관에 남아 있는 이 통신부는 세로 5.5㎝, 가로 1.7㎝의 크기의 것으로 ‘通信符’라는 문자를 전자(篆字)로 양각한 뒤 세로로 나눈 것의 오른쪽 부분이었다. 명에서 해외의 정식 통교자에게 증빙을 위하여 주었던 감합(勘合)과 유사한 형태로 그 이전까지 조선에서는 발행한 적이 없었다. 이는 점차 문제가 되기 시작한 가짜 사신인 위사(僞使) 대책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대내씨에 대해 발부한 기록은 없지만 그 후 1474년(성종 5)에는 일본국왕사에게 부험(符驗)을 내주었다는 내용이 있었다(『성종실록』 5년 12월 15일).

참고문헌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
  • 松岡久人, 『大內氏の硏究』, 淸文堂出版, 2011.
  • 須田牧子, 『中世日朝關係と大內氏』, 東京大學出版會, 2011.
  • 한일관계사학회 편, 『왜구 위사 문제와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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