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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16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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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평경직 |
한글표제 | 평경직 |
한자표제 | 平景直 |
동의어 | 유천경직(柳川景直), 유천지영(柳川智永) |
관련어 | 기유약조(己酉約條), 대마도(對馬島), 왜관(倭館), 임진왜란(壬辰倭亂) |
분야 | 정치/외교/사행 |
유형 | 인물 |
지역 | 일본 |
시대 | 조선후기 |
왕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허지은 |
성별 | 남자 |
몰년/일 | 1613년 |
출신지 | 대마도(對馬島) |
가족관계(부,조,외조[모], 장인[처], 형제) | 부: 유천조신(柳川調信), 아들: 유천조흥((柳川調興)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평경직(平景直)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실록』 36년 6월 9일, 『선조실록』 39년 7월 4일, 『인조실록』 24년 9월 21일 |
일본 강호(江戶)시대 대마도 도주의 가신(家臣).
개설
임진왜란 후 조선과 일본의 관계 개선에 큰 역할을 한 인물로, 조선과 일본이 국교를 재개한 기유약조(己酉約條) 체결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활동사항
1598년 풍신수길(豐臣秀吉)이 죽고 일본군(日本軍)의 전면 철수가 이루어지자마자 대마도(對馬島) 도주(島主) 평의지(平義智)는 조선과의 접촉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불신이 컸던 조선은 대마도에서 파견한 사자(使者)들을 모두 억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마도에서는 계속해서 사자를 파견하였고, 임진왜란 당시 끌려간 조선인 포로들을 송환하는 등 양국 간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고 일본 내에서 패권을 장악한 덕천가강(德川家康)은 정권의 안정성과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조선과의 전후 처리를 완결 짓고 조선으로부터 일본을 대표하는 정권으로 인정받으려 하였다. 따라서 덕천가강은 대마도로 하여금 조선에 평화우호의 뜻을 전달하게 하였고, 대마도에서는 사자를 보내 일본의 내부 상황과 덕천가강의 화친의사를 전하고 사절 파견을 요청하는 등 조선과의 국교 회복과 무역 재개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선조실록』 36년 6월 9일). 그 결과 1604년(선조 37) 조선에서 일본의 내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승려 유정(惟政)과 손문욱(孫文彧)을 파견함으로써 비로소 국교 회복의 전기가 마련되었다. 이때 평경직은 제대부(諸大夫)가 되었고, 풍전수지영(豊前守智永)이라고 칭하였다. 그 직후 아버지 유천조신이 사망하여 집안의 대를 이었다.
이후 조선에서는 국교 회복의 조건으로 일본 장군(將軍)의 국서와 임진왜란 중에 선대(先代) 왕의 능묘를 파헤친 범인의 소환을 요구하였고(『선조실록』 39년 7월 4일), 2가지 조건이 이행된 후 1607년(선조 40) 조선에서 일본에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를 파견함으로써 양국 간의 국교는 회복되었다. 평경직은 막부(幕府)의 지시로 임진왜란 이후 처음으로 조선에서 정식 사자인 회답겸쇄환사를 일본에 오게 한 공으로 도주 평의성에게 내려진 영지 중 일부를 받았다. 그러나 도주를 도와 회답겸쇄환사의 방일을 실현시키는 과정에서 평경직은 국서 위조와 개찬(改竄)을 획책하기까지 하였다.
1609년에는 경철현소(景轍玄蘇)와 함께 기유약조(己酉約條) 체결 교섭에 참여하였다. 기유약조의 내용은 첫째, 대마도주에게 1년에 하사하는 쌀과 콩은 모두 100석으로 한다. 둘째, 왜관(倭館) 접대는 3가지 예로 한다. 즉, 국왕사(國王使)·대마도주특송(對馬島主特送)·대마도수직인(對馬島受職人)이다. 셋째, 국왕 사선(使船)이 올 때는 상선(上船)과 부선(副船)으로 한다. 넷째, 도주 톡송선(特送船)은 3척으로 하되 그 밖에 사선을 파견할 경우라도 세견선(歲遣船)에 따라 붙어야 한다. 다섯째, 도주의 세견선은 20척으로 한다. 여섯째, 수직인은 1년 1회 내조(來朝)하되 다른 사람은 파견할 수 없다. 일곱째, 평시수직인(平時受職人)은 죄를 면하여 주되 다시 거론하지 않는다. 여덟째, 배는[船型] 세 종류로 하는데 25척 이하는 소선(小船)으로 선부(船夫)는 20명, 26척은 중선(中船)으로 선부는 30명, 28척 내지 30척은 대선(大船)으로 하되 선부는 40명이며 선례를 척량한다. 또한 선부 점검 때에는 정해진 수를 초과할 수 없으며, 정원 미달 때에는 점검할 때 수에 따라 급료를 정한다. 아홉째, 모든 선박은 도주의 문인(文引)을 가지고 와야 한다. 열째, 도주에게는 전례에 따라 도서(圖書)를 만들어 준다. 그 모양은 종이에 찍어서 예조와 교서관(校書館) 그리고 부산포에 두어 서계(書契)가 올 때마다 그 진위를 점검하여 격식이 틀리고 도서가 없는 선박은 돌려보낸다. 열한째, 문인이 없는 자는 적(敵)으로 취급한다. 열두째, 과해량(過海粮)은 대마도인은 5일량(粮), 도주 특송선은 10일량, 국왕사는 20일 찬(撰)으로 한다. 열셋째, 기타는 전례에 따른다는 것으로 모두 13개 조항이었다.
기유약조 체결로 조선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교류를 허락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부산포에 다시 왜관(倭館)이 설치되었고, 이곳에서 조·일 간의 무역·외교의 업무가 이루어졌다. 평경직은 기유약조 체결의 공으로 송사선(送使船) 1척의 무역특권을 인정받았다.
상훈 및 추모
평경직은 1613년(광해군 5)에 사망하였다. 그가 사망한 후 조선에서는 역관(譯官)을 보내어 조문(弔問)을 하였다. 그때 평경직의 아들 평조흥(平調興)이 사례하면서 조선의 은사(恩賜)를 허비할 수 없어 새로 조그마한 집을 지었으니 편액(扁額)을 써 달라고 해서 비변사에서는 유방원(流芳院) 세 글자를 써 주었다. 그런데 1446년(인조 24)에는 1622년(광해군 14)에 평조흥의 사당이 지어졌다고 하면서 예전과 같이 사송선(使送船) 1척을 보내어 향화(香火)하는 비용을 얻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하여 조선에서는 한 척을 허락하였다(『인조실록』 24년 9월 21일).
참고문헌
- 『변례집요(邊例集要)』
- 三宅英利 著·손승철 譯, 『근세 한일관계사 연구』, 이론과실천, 1991.
- 손승철 編著, 『근세 한일관계사』, 강원대학교 출판부, 1987.
- 田代和生 著·손승철 譯, 『근세 한일외교비사』, 이론과실천, 1988.
- 한명기,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 2011.
- 현명철, 『19세기 후반의 대마주와 한일관계』, 국학자료원, 2003.
- 『日本人名大辭典』, 講談社, 2009.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
- 閔德基, 『前近代東アジアのなかの韓日關係』, 早稻田大學出版部, 1994.
- ロナルド-トビ 著·速水·永積·川勝 譯, 『近世日本の國家形成と外交』, 創文社, 1990.
- 李啓皇, 『文祿·慶長の役と東アジア』, 臨川書店,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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