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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16 기준 최신판




임진왜란 당시 송응창의 후임으로 1594년 초~5월까지 경략(經略)의 임무를 수행했던 인물.

개설

고양겸은 송응창이 1593년 말 탄핵되어 본국으로 소환되자 그를 대신해 경략부를 지휘했던 인물이다. 송응창과 이여송 등이 명 조정에 거짓 보고를 하고 일본과의 강화를 추진했던 사실 때문에 탄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전쟁의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조선 조정의 반대를 무시하고 명에 대한 일본의 조공과 일본군의 전면 철수를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조선 조정에 일본의 봉공(封貢)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는 주본을 올리도록 강요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역시 강화교섭을 추진하면서 일본군의 실상을 명 조정에 숨긴 일 등이 문제가 되어 탄핵을 받았고 직임에서 물러난 후 본국으로 돌아갔다.

활동 사항

명(明)의 감찰 관리인 과도관(科道官)들은 송응창과 제독(提督)이여송(李如松) 등이 강화교섭을 위해 조정에 허위 보고를 했다는 점을 파악하고 이들을 탄핵했다. 결국 강화교섭을 추진했던 송응창 등의 주화파(主和派)는 모두 실각한다. 송응창은 1593년(선조 26) 12월에 경략직에서 물러났고, 계료보정총독(薊遼保定總督)고양겸이 그를 대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경략직을 수행하게 된 고양겸도 조선에 있던 일본군을 제압할 수 있는 방안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특히 명에서는 산동(山東)·하남(河南)·대강(大江) 이북 지역에서 기근과 흉년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대규모의 군사를 동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고양겸 역시 전임자의 방안을 따라 강화교섭으로 조선의 상황을 해결하고자 했다.

고양겸은 자신의 부임 초기에는 자신의 의도를 조선 측에 명백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1594년(선조 27)이 되자 자신의 의도를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처음 고양겸은 유격장군(遊擊將軍)심유경(沈惟敬)이 추진했던 강화를 반대하는 것 같은 태도를 보였다. 심유경의 강화 추진 방안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곤장을 치려고 했다는 일 등이 조선 조정에까지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해 4월 말에 고양겸은 조선 측에 자신이 5월 중순경에 호택과 함께 바다를 건너가서 명에 봉공(封貢)하도록 하겠다는 의사를 보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고양겸은 참장(參將)호택(胡澤)을 보내 조선 조정에 일본의 봉공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는 주본을 보내도록 강요하기 시작했다(『선조실록』 27년 5월 27일).

결국 조선 조정에서는 논란 끝에 고양겸의 요청에 따라 일본의 봉공을 요청하는 주본을 황제에게 보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고양겸 역시 탄핵을 당해 경략에서 체직되었다. 그의 후임은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郞)손광(孫鑛)이 맡게 되었다. 조선에서 명에 일본군의 동정과 관련된 정보를 보고할 때 몇 가지 실상을 포함시켰다. 이 보고에 따라 명 내부의 척화론자들이 송응창과 고양겸을 탄핵하였고 이어서 석성(石星)과 이여송(李如松)까지 탄핵하게 되었다(『선조수정실록』 27년 8월 1일).

사실 고양겸 등이 일본의 봉공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명 조정 내부에는 큰 논란이 있었다. 당시 고양겸과 이여송 등 5~6인의 대신과 호부(戶部)·병부(兵部)는 일본의 봉공을 허락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반면 과도관들은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일본의 봉공을 반대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중국 황제였던 만력제(萬曆帝)는 망설이면서 일본의 봉공에 대한 승인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선조실록』 27년 6월 7일). 고양겸 등에 대한 명 조정의 탄핵은 이러한 정치적 상황이 반영된 조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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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신종실록(明神宗實錄)』
  • 『양조평양록(兩朝平壤錄)』
  • 『연려실기술(燃黎室記述)』
  • 『정한위략(征韓偉略)』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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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