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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을 건국한 누르하치의 동생 슈르하치의 차남으로 정묘호란의 책임자.

개설

아민은 누르하치([努爾哈赤], Nurhaci)의 동생인 슈르하치([舒爾哈齊], Šurhaci)의 차남으로 양람기(孃藍旗)의 기주였다. 그는 1516년 4대 버일러[貝勒] 칭호를 받고 국정을 함께 논의하였다. 1619년 사르후([薩爾滸], Sarhū) 전투에서 강홍립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1627년에는 조선 침략의 책임을 맡아 출정하기도 하였다. 1630년 후금은 영평(永平)의 수비 실패로 죄를 받아 1640년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가계

아민은 누르하치의 동생인 슈르하치의 차남이다.

활동 사항

아민은 조선 측 기록에는 아민태주(阿民太主)로 나타나는데(『광해군일기』 13년 9월 10일), 중국 측 기록에는 아민(阿敏)으로 표기되어 있기도 하다.

그는 후금의 군사, 행정조직인 팔기(八旗, [Jakūn gūsa])의 하나인 양람기의 기주로, 1608년 누르하치의 장남 추연([褚英], Cuyen)과 함께 우라[烏喇]를 정벌하고 한산성(罕山城)을 점령한 후 돌아왔으며, 1612년에 타이지([台吉], taiji]의 칭호를, 1616년 4대 패륵(貝勒, [beile]) 칭호를 받았다. 서열이 2번째였던(두 번째였던) 아민은 다이샨([代善], Daisan)·망굴타이([莽古爾泰], Manggultai)·홍타이지([皇太極], Hongtaiji) 등과 함께 국정을 논의하였다.

1619년 3월에 벌어진 심하(사르후)전투에서 명군과 함께 참여한 조선의 장수 강홍립(姜弘立)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으며, 해서여진의 여허[葉赫]부를 정복하는 데에도 참여하였다. 1621년 3월에는 심양(瀋陽)과 요양을 공격하는 데에도 참여하였으며, 진강성(鎮江城)의 장군 진량책(陳良策)이 명의 모문룡(毛文龍)에게 귀부하자, 밤을 틈타 강을 건너 진강을 공격해 모문룡을 패주시켰다.

아민은 1627년 1월 8일 한(汗, han)에 오른 홍타이지의 명에 의하여, 조선 정벌의 책임을 맡았다(정묘호란). 당시 후금군은 1월 13일 압록강을 건너 의주성을 함락시킨 후, 병사를 둘로 나누어서, 하나는 해로로 철산(鐵山)에 주둔하고 있는 모문룡을 공격하였고, 다른 한 부대는 육로로 진군하여 정주(定州)를 함락시켰다. 아민이 거느린 부대는 남하하여 서울에 가까운 평산(平山)까지 이르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해 들어갔다. 정묘호란은 1627년 3월 3일 형제 관계를 맺은 사실을 하늘에 고하고 그것을 준수하겠다는 맹세 의식을 치름으로써 끝을 맺었다. 조선과 평화 교섭을 맺고 회군하였다.

아민은 조선 측과 협상이 진행 중인 1627년 2월 도성으로 진격하겠다며, 조선에서 경작하며 살고 싶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이를 마땅하지 않게 여긴 다른 버일러들에게는 돌아가고 싶은 자는 돌아가라며 한 걸음 물러났지만, 누르하치의 장남 추연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두두([杜度], dudu)에게 함께 살자는 제안을 하기도 하였다. 결국 아민의 동생 지르갈랑과 다른 장수들이 모두 나서서 설득한 다음에야 전진하겠다는 고집을 꺾었다.

1630년 후금은 영평(永平)·난주(灤州)·천안(遷安)·준화(遵化) 등을 점령하고, 그 수비를 아민에게 맡겼다. 아민은 영평에 주둔하고 여러 장군들을 나누어 3성을 지키게 하였다. 명의 경략손승종(孫承宗)이 난주를 공격해 오자, 아민은 수백 명의 원군을 보냈으나, 홍이포 등을 동원한 명나라 병사에 밀려 성을 버리고 영평으로 옮겼다. 이후 아민은 전투를 벌이지 않고 영평의 한인들을 살해하고 후금 병사들을 거느리고 회군하였다.

같은 해 6월에 홍타이지는 전투도 벌이지 않고 회군한 아민에 대하여 처벌을 하였다. 당시 아민이 받은 죄목은 후금 체제를 이탈하려 한 것과 조선 정벌 때 즉시 철군하지 않고 두두와 한성에 머무르려고 하였다는 등의 16가지 이유였다. 홍타이지는 아민의 전공을 참작하여 죽음은 면해 주었다. 그 후 아민은 유배되었는데, 그가 소유하였던 양람기는 동생 지르갈랑에게 넘어갔다. 그는 1640년 11월에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 『청사고(淸史稿)』
  • 한명기, 『병자호란』, 푸른역사, 2013.
  • 송미령, 「천총 연간(1627-1633) 지배체제의 확립과정과 조선정책」, 『중국사연구』 54,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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