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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강희 연간에 공부의 우시랑, 호부의 좌시랑 등을 역임한 러이후([雷虎], leihū,)의 한자 이름.

개설

러이후는 순치제대에 공부(工部)의 계심랑(啓心郎)으로 활동하였고, 이후 우시랑(右侍郎)으로 승진하였다. 강희제대에는 호부(戶部)의 좌시랑(左侍郎), 내각(內閣) 학사(學士)를 역임하였으며, 예부(禮部)의 시랑(侍郞)을 지냈다. 1666년 청의 상사(上使)로서 조선에 들어와 유황의 밀매 문제와 도망인 은닉 문제와 관련한 강희제의 칙서를 반포하였으며, 이에 대한 처벌을 논의하였다.

활동 사항

러이후는 순치제대에 공부 계심랑으로 있었다. 강희제의 등극 직후인 1661년 1월에 공부의 우시랑으로 승진하였다가 1664년 12월에는 공부의 우시랑에서 호부 좌시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의하면, 1666년 러이후가 조선에 조사(詔使)로 파견될 당시 직책은 호부 좌시랑이었다. 그리고 1672년 러이후가 병으로 면직을 요청하던 당시 호부 우시랑으로 확인되는 점으로 미루어 1666~1672년 사이에 우시랑으로 인사이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679년에는 내각 학사로 임명되었고, 동시에 예부 시랑을 겸직하게 되었다. 이로 보아 러이후는 청 조정에서 상당히 활발한 활동을 하였던 인물로 추정되지만 직접적인 관련 자료는 확인되지 않는다.

러이후는 호부의 시랑으로 있던 1666년 5월 강희제의 칙서를 가지고 조선에 방문하였다. 당시 조선을 방문한 사절은 상사(上使)러이후를 비롯하여 부사(副使)인 낭중(郎中)목(穆), 제독(提督)으로 한 급을 더한 동(佟) 등 세 사람을 비롯하여 조선인 출신의 이일선(李一善) 외 5명의 통관(通官) 등이었다. 이들은 조선이 사행길에서 화약의 제조를 위한 유황을 몰래 구매한 사실과 조선인 도망자 안추원(安秋元)을 숨겨 주었던 사건 등을 조사하기 위하여 파견된 것이었다.

『동문휘고(同文彙考)』의 『조칙록(詔勅錄)』에 의하면 패문(牌文)은 1666년 5월 10일에 파견되어 15일 만인 25일에 의주에 도착하였고, 러이후 일행은 5월 19일에 출발하여 6월 17일에 압록강을 건너 7월 8일 경성(京城)에 들어왔다. 그리고 7월 21일에는 회정(回程)하고 8월 8일에 도로 강을 건너 청으로 돌아갔다.

러이후는 1666년 7월 조선에 도착하여 황제의 칙서를 반포하였고, 조선 왕과 대신들을 상대로 사건의 경위와 추이를 조사하였다. 러이후는 황제의 의사라고 하면서 조선 왕과 대신들의 죄를 따졌고, 상국(上國)인 청의 도망자를 은닉하는 행위는 사죄(死罪)에 해당한다며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하였다(『현종실록』 7년 7월 17일). 현종(顯宗)이 직접 자신의 죄를 자처하며 사건의 해결을 모색하였으나, 러이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조선 조정을 압박하였다. 결국 이 사건은 이듬해 현종에게 벌은(罰銀) 5,000냥을 부과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러이후를 비롯한 청의 사신단은 정축화약(丁丑和約)을 계속해서 강조하면서 조선을 압박하였는데, 이는 청이 내외에서 정치적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 사태를 반영하였다. 청은 조선을 압박하고 자신들의 영향력을 재차 각인시키기 위하여 러이후 등을 파견하여 사건을 확대하였고, 결국에는 사죄를 조율하는 형식으로 왕에게 벌은을 부과하여 사건을 처리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동문휘고(同文彙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청성조실록(淸聖祖實錄)』
  • 남미혜, 「병자호란기 조선 피로인의 호지체험과 삶」, 『동양고전연구』 32, 2008.
  • 한명기, 「병자호란 시기 조선인 포로 문제에 대한 재론」, 『역사비평』 85,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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