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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여진 여허([葉赫], yehe) 사람으로 누르하치 시절에 귀부한 바키란([霸奇蘭, 巴齊蘭], bakiran)의 한자 이름.

개설

바키란은 본래 해서여진의 수장 계층 가운데 하나인 여허 나라([葉赫納喇], yehe nara)씨로서 현재 중국 길림성(吉林省) 이통현(伊通縣)에 해당하는 이바단(伊巴丹)에 대대로 살았다. 누르하치([奴兒哈赤], nurhaci) 시기에 무리를 거느리고 건주여진으로 귀부하였다. 만주 팔기(八旗)가 설립된 후 만주 양홍기(鑲紅旗)에 소속되었다가 홍타이지가 한(汗, han, [칸])으로 즉위한 직후에 정황기(正黃旗)의 조견대신(調遣大臣)이 되었다. 누르하치 시기부터 여러 차례 전투에 참전하였고, 1633년에는 삼등 부장(三等副將, [ilaci jergi meiren i janggin]), 1635년에는 일등 부장(一等副將, [uju jergi meiren i janggin])으로 승진하였다. 1636년에 병으로 죽었다.

가계

바키란은 해서여진 여허 나라씨로 구체적인 가계는 알기 어렵다. 아들로는 바이산([拜山], baisan)이 있었다.

활동 사항

바키란은 누르하치 시기부터 여러 차례 전투에 참전하여 전공을 세워 누르하치 시기에는 유격(遊擊)을 지냈다. 1626년에 각 기에 2명씩 총 16명의 조견대신을 두었는데, 이때 바키란은 정홍기에 임명되었다. 홍타이지 시기인 1633년에는 여순구(旅順口)를 함락시킨 공적으로 삼등 부장으로 승진하였고, 1635년에는 잘란 장긴 삼시카([薩穆什喀], samsika)와 함께 좌익(左翼)과 우익(右翼)을 각각 거느리고 흑룡강 중류의 동해여진 와르카([瓦爾喀], warka) 부락들을 초무하는 공을 세워 일등 부장으로 승진하였다.

바키란은 여러 차례 조선에 사신으로 파견된 인물이었다. 정묘호란이 끝난 직후인 1626년 8월에는 조선이 보낸 사신 신경호(申景琥)·박난영(朴蘭英)을 대동하고 아시다르한([阿什達爾漢], asidarhan)과 함께 사신으로 파견되어 홍타이지의 서신을 전달하였다. 이때의 사행에서 심하(사르후[薩爾滸]) 전투 이후 포로가 되었던 오신남(吳信男)과 이후 후금에 파견되었다가 억류되었던 박난영의 형 박규영(朴葵英), 강홍립(姜弘立)의 아들 강숙(姜璹), 박난영의 아들 박입(朴雴) 등이 송환되었다(『인조실록』 5년 8월 12일). 바키란 일행은 이해 8월 14일 조선 왕 인조를 접견하여 홍타이지가 보낸 선물과 서신을 올렸다(『인조실록』 5년 8월 14일). 바키란은 같은 달 20일에 귀환하여 인조의 서신을 홍타이지에게 전하기도 하였다. 바키란은 이해 12월 참장(參將)잉굴다이([英俄爾岱], inggūldai)와 함께 조선 사신 박난영을 대동하고 재차 조선을 방문하여 호시(互市) 문제를 논의하였으며, 1629년 2월에는 만다르한과 함께 의주에 와서 조선이 후금에 전달하기 위하여 쌓아 둔 쌀을 실어가기도 하였다(『인조실록』 7년 2월 16일).

상훈 및 추모

바키란은 1636년 2월 여순구를 함락할 때 얻은 상처가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홍타이지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삼등 암바 장긴([三等昻邦章京], ilaci jergi amba janggin)을 추증하고, 그의 아들 바이산으로 하여금 계승하게 하였으며 13번 이을 수 있게 하였다.

참고문헌

  • 『청태종실록(淸太宗實錄)』
  • 『만문노당(滿文老檔)』
  • 『청사고(淸史稿)』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