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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15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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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장정옥 |
한글표제 | 장정옥 |
한자표제 | 張廷玉 |
관련어 | 군기처(軍機處), 명사(明史) |
분야 | 정치/외교/외교사안 |
유형 | 인물 |
지역 | 중국 |
시대 | 청/조선 |
왕대 | 청/조선 |
집필자 | 김소영 |
이칭(자,호,봉작호,시호) | 자: 형신(衡臣), 연재(硯齋), 시호: 문화(文和) |
성별 | 남 |
생년/일 | 1672년 10월 29일 |
몰년/일 | 1755년 5월 19일 |
출신지 | 안휘(安徽) 동성(桐城) |
관력 | 시강학사(侍講學士), 내각(內閣) 학사(學士), 형부(刑部) 시랑(侍郞), 예부(禮部) 상서(尙書), 한림원 장원학사, 군기대신(軍機大臣) |
가족관계(부,조,외조[모], 장인[처], 형제) | 부: 장영(張英), 자: 장약애(張若靄), 장약징(張若澄), 장약정(張若渟)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장정옥(張廷玉)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영조실록』 8년 5월 8일, 『영조실록』 13년 4월 9일 |
청나라 초기 강희제·옹정제대의 관료.
개설
장정옥은 청나라 초 강희제·옹정제 두 황제로부터 신임을 얻어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다. 1730년 옹정제가 군기처를 설립하였을 때에 장정옥은 악이태(鄂爾泰)와 함께 군기대신(軍機大臣)에 임명되어 관련 규정을 제정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문장에도 뛰어나 『명사(明史)』·『성조실록(聖祖實錄)』·『세종실록(世宗實錄)』·『청회전(淸會典)』 등의 편찬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옹정제의 뒤를 이은 건륭제는 장정옥의 권력이 강화되는 것을 경계하여 그를 적대하였다. 이후 장정옥은 귀향하여 여생을 보낸 후 1755년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가계
장정옥은 대학사(大學士)장영(張英)의 차남으로, 한족 출신이다. 형인 장정찬(張廷瓚)은 첨사부(詹事府) 소담사(小詹事), 동생인 장정로(張廷璐)는 예부(禮部) 시랑, 장정전(張廷瑑)은 공부 시랑을 지냈다. 장자인 장약애(張若靄)는 남서방행주(南書房行走), 차자인 장약징(張若澄)은 내각 학사 등의 관직을 지냈다.
활동 사항
장정옥은 1700년에 진사시에 급제하고 한림원에서 시강학사(侍講學士)와 내각(內閣) 학사(學士), 형부(刑部) 시랑(侍郞)을 역임하였다. 강희제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옹정제 즉위 후 예부 상서(尙書)에 임명되고, 남서방(南書房)에서 근무하였다. 1728년에는 보화전대학사(保和殿大學士)로 승진하고 이부(吏部) 상서를 겸하였다. 1730년 옹정제가 군기처를 설립하였는데 장정옥은 악이태(鄂爾泰)와 함께 군기대신(軍機大臣)이 되어 관련 규정을 제정하였다. 문장 실력이 뛰어나 『명사』·『성조실록』·『세종실록』·『청회전』 등의 편찬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명사』에는 조선에 관한 기록도 있었다. 조선은 『명사』가 편찬된 후 조선 열전을 받아 왔다. 당시 전체를 얻어 오려고 하였으나, 장정옥 등이 어렵게 여겨 가지고 오지 못하였다고 한다(『영조실록』 8년 5월 8일).
옹정제는 장정옥을 절대적으로 총애하여 또 다른 총신(寵臣)이었던 악이태와 함께 두 사람이 죽은 뒤 태묘에 안장하라는 유지를 내렸다. 하지만 옹정제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오른 건륭제는 내외의 신망을 얻어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장정옥을 경계하고 적대하였으며, 이러한 정황은 조선에도 전해졌다(『영조실록』 13년 4월 9일). 그는 만주족 출신 대신 악이태와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장정옥은 1749년에 귀향하여 여생을 보내다가 노환으로 84세에 타계하였다. 건륭제는 선친인 옹정제의 명에 따라 태묘에 안장하게 하고, 문화(文和)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
저술 및 작품
『명사(明史)』·『성조실록(聖祖實錄)』·『(명)세종실록(世宗實錄)』·『청회전(淸會典)』·『장회원문존(張懷園文存)』·『전경당집(傳經堂集)』
묘소
용면산(龍眠山) 문화원(文和園).
참고문헌
- 송미령, 「건륭 초 구세력 배제와 군기처 정비」, 『명청사연구』 18,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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