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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15 기준 최신판




임진왜란 당시 조선으로 출병한 명 장수 송응창의 기고관.

개설

장구경은 경략송응창의 기고관(旗鼓官)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명군에서 기고관은 일종의 비서관으로, 장구경은 상관인 경략송응창의 지시 사항, 의도 등을 조선 조정에 전달했다. 조선 조정 역시 그를 통해서 경략의 지시 사항과 의사 등을 확인했다. 장구경은 송응창의 최측근이었으므로 조선은 그를 통해 정확하고 유용한 정보를 얻으려 하였다.

활동 사항

평양성 전투에서 명군이 대승을 거둔 이후 조선 조정의 최대 관심사는 명군의 진격 여부였다. 따라서 조선 조정에서는 공조 정랑황기(黃沂)를 문례관(問禮官)으로 파견해 경략송응창의 의사를 파악하고자 했다. 당시 장구경은 황기에게 동쪽으로 가려고 하니, 조속히 인부 2백 명과 말 1백 필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조선 조정에서는 장구경의 발언을 통해 송응창이 의주(義州)에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이라 예측했다(『선조실록』 26년 2월 30일).

1593년(선조 26) 4월 장구경은 예조 판서윤근수(尹根壽)에게 경략이 반드시 조선의 일을 마친 뒤에야 철군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아울러 일본군이 자신들과 약속한 조항들이 있는데 만약 이를 어긴다면 경략이 진군해서 모두 섬멸할 것이라는 내용도 전했다(『선조실록』 26년 4월 2일).

특히 장구경은 명군 내부의 중요한 정보를 조선 조정에 알려주기도 했다. 당시 명군의 여러 장수들은 조선이 복수에 급급해 군마와 군량을 제대로 지원하지 못하고 있다며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명군의 진격을 멈추고 한강을 지키면서 형세를 보다가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선조실록』 26년 5월 10일). 장구경은 이와 같이 여러 정보를 조선 조정에 알려주었다.

참고문헌

  • 『기재사초(寄齋史草)』
  • 『명신종실록(明神宗實錄)』
  • 『양조평양록(兩朝平壤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정한위략(征韓偉略)』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
  •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99.
  • 김경태, 「임진전쟁 강화교섭 전반기(1593.6~1594.12), 조선과 명의 갈등에 관한 연구」, 『한국사연구』166, 한국사연구회, 2014.
  • 손종성, 「임진왜란시 대명외교 - 청병외교를 중심으로」, 『국사관논총』제14집, 국사편찬위원회, 1990.
  • 이현종, 「16세기 후반기 동아(東亞)의 정세」, 『한국사』12, 국사편찬위원회, 1977.
  • 조원래, 「5. 조·명군의 반격과 전국의 추이」, 『한국사』29, 국사편찬위원회, 1995.
  • 최소자, 「임진란시 명의 파병에 대한 논고」, 『동양사학연구』11, 동양사학회, 1977.
  • 최영희, 「임진왜란 중의 대명사대에 대하여」, 『사학연구』18, 한국사학회,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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