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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막부의 초대 장군.

개설

일본 전국(戰國)·안토도산(安土桃山)시대, 강호시대의 무장이자 정치가였다.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죽은 뒤 1600년 관원(關が原) 전투에서 동군을 지휘하였으며, 승전 이후에 강호막부를 개창하여 초대 장군(將軍, [쇼군])이 되었다. 장군 재임기간은 1603년부터 1605년까지였다. 1605년에 3남인 수충(秀忠)에게 장군직을 물려준 다음에도 대어소(大御所)의 자격으로 준부(駿府)에 머물며 정치에 참여하였다. 사후에는 일광(日光)의 동조궁(東照宮)에 묻혔으며, 동조대권현이라는 시호를 얻었다.

가계

덕천가강(德川家康)은 1542년 12월 26일 삼하국(三河國) 강기성(岡崎城)에서 태어났다. 아명(兒名)은 송평죽천대(松平竹千代)였다. 아버지는 성주(城主)인 송평광충(松平廣忠)이며, 어머니는 가리야성(刈谷城)의 성주인 수야충정(水野忠政)의 딸 오다이(お大, 傳通院殿)였다. 1556년 15세가 되던 때에 가강은 후견인이었던 금천의원(今川義元)의 이름에서 한 글자를 받은 송평차랑삼랑원신(松平次郞三郞元信)으로 불리었다. 1560년에는 이름을 의원(義元)에서 가강(家康)으로 개명하였으며, 1567년에는 송평씨에서 덕천씨(德川氏)로 성을 바꾸어서 덕천가강이 되었다. 가강은 슬하에 11남 5녀를 두었는데, 3남인 수충이 장군직을 계승하였고, 의직(義直)·뢰선(賴宣)·뢰방(賴方)은 각각 어삼가(御三家)인 미장(尾張)·기이(紀伊)·수호(水戶)의 시조가 되었다.

활동 사항

1586년(선조 19) 풍신수길이 가강을 경도에 올라오게 하자 가강도 수길에게 신하의 예를 표하고, 정3위권중납언(正三位權中納言)에 서임되었다. 1587년에는 종2위권대납언(從二位權大納言)이 되었고, 1590년에는 후북조씨(後北條氏, 고호조씨)가 멸망하자 수길은 가강에게 후북조씨의 옛 영지인 이두(伊豆)·상박(相摸)·무장(武藏)·상야(上野)·하총(下總)의 6개 지방으로 전봉(轉封)을 명하였으므로 가강은 이에 따라 강호(江戶)를 본거지로 정하였다. 새로운 영지는 2,500,000석에 달하여 가강은 풍신 정권 하에서 최대의 대명이 되었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풍신수길이 병으로 쇠약해지자 오대로(五大老)의 우두머리로 큰 세력을 가지게 되어 1596년에는 정2위내대신(正二位內大臣)으로 승진하여 내부(內府)라고 불리었다. 1598년 풍신수길이 사망하자 이달정종(伊達政宗)·복도정칙(福島正則)과 혼인 관계를 맺는 등 풍신수길이 생전에 대명들 간의 혼인을 금지하였던 것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전횡하였기 때문에 다른 4대로 및 석전삼성(石田三成) 등과 대립하기도 하였지만, 가강은 오히려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였다. 1600년에 있었던 관원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무가 정권의 대표자로서 지위를 획득하였다. 그리고 1603년 2월 12일에는 복견(伏見)성에서 후양성천황(後陽成天皇)으로부터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에 임명되었으며, 종1위우대신(從一位右大臣)이 되어 강호막부(江戶幕府)를 열고, 정식으로 전국에 대한 통치권을 장악하였다(『광해군일기』 7년 윤8월 12일)(『광해군일기』 8년 5월 20일).

가강은 실정막부(室町幕府) 이래 여러 권력자들이 경도에 본거지를 둔 것과는 달리 자신의 본거지인 강호에 막부를 개창하였던 것이다. 그 후 강호와 복견을 왕복하던 가강은 풍신수길을 비롯한 풍신씨의 위협 세력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덕천장군(德川將軍)의 형식적인 지위를 안정적으로 굳히고자 1605년 4월 16일에 아들 수충(秀忠)에게 장군직을 양위하였다. 그는 1607년 준부성(駿府城)을 축조하고 이곳에 들어간 후 명목상으로는 은거하지만, 스스로를 대어소라고 지칭하면서 조정·신사와 사찰 관계·외교, 화폐, 교통 등 전국적인 정무를 총괄하여 에도에 있는 막부와 함께 이원정치(二元政治) 체제를 이루었다.

1611년에는 경도의 이조성(二條城)에서 풍신수뢰(豊臣秀賴)와 회견하고, 이어 1613년부터 1615년에 걸쳐서 대판성을 공격하여 풍신씨를 멸함으로써 잠재적인 위협 요소였던 풍신씨를 완전히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다. 아울러 같은 해에는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와 금중병공가제법도(禁中幷公家諸法度)를 제정하여 막부의 기초를 다졌다.

가강은 1616년 4월 17일에 7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유언에 따라 가강이 사망한 날 밤에 가강의 유해를 비밀리에 구능산(久能山)으로 옮겨 장사지낸 후, 가강을 신격화하기 위하여 권현(權現)이라는 호칭이 주어졌으며, 이듬해인 1617년 4월에는 하야(下野)의 일광산(日光山)으로 이장되었다. 이로써 ‘동조궁(東照宮)’ 또는 ‘동조신군(東照神君)’이 가강에 대한 존칭이 되었다.

가강은 기독교에 대해서 강경한 탄압 정책을 전개하였다. 가강은 처음에는 해외무역을 확대하려는 목적으로 예수회를 비롯한 기독교 선교사들의 전교 활동을 묵인하였지만 강본대팔(岡本大八)의 뇌물 사건 이후 풍신씨의 잔당 쪽에 기독교도가 많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아 기독교를 탄압하는 정책으로 바꾸었다. 1612년 3월에 강호·대판·경도에 새로운 금교령이 발표되었고, 이듬해 12월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금교령 발표 이후 가강은 모든 백성에게 불교를 믿도록 하였으며, 기독교를 믿고 있던 이들에게도 신도나 불교로의 개종을 강요하였다. 1616년에는 유럽인의 거주와 무역의 공간을 평호(平戶)와 장기(長崎)의 출도(出島)에 한정하였다.

한편으로 주변국과의 외교정책도 중시하여 임진왜란으로 단절되었던 조선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대마도주 종의지(宗義智)에게 조선과의 국교회복과 통신사 파견 요청을 지시하였다. 그 결과 1607년에 제1차 회답겸쇄환사가 일본에 파견되었으며, 1609년에는 기유약조(己酉約條)가 체결되면서 조일 간의 국교가 회복되었고, 삼포왜란 이래 폐지되었던 왜관이 동래에 다시 설치되어 외교의례와 무역이 정상화되었다. 그러나 명나라와는 정식적인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평호와 장기에서의 사무역 정도만이 이루어졌으며 타이완·필리핀·시암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과도 사무역이 종종 이루어졌다. 다만 같은 해, 살마국(薩摩國)의 도진씨(島津氏)에 의한 유구(琉球)침략이 있었다.

묘소

일본 회목현(栃木縣) 일광시(日光市) 동조궁(東照宮).

참고문헌

  • 小和田哲男 編, 『德川氏の硏究』, 吉川弘文館, 1983.
  • 北島正元, 『江戶幕府の權力構造』, 岩波書店, 1964.
  • 煎本增夫, 『幕藩體制成立史の硏究』, 雄山閣出版,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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