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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 5대 대칸.

개설

아리가(阿里哥)는 몽골어 아릭부케(Ariγböke)의 한자 음역 표기로, 아리불가(阿里不哥)라고도 하였다. 몽골제국 5대 대칸으로 즉위해 친형인 쿠빌라이와 계승분쟁을 하였다.

가계

칭기즈칸의 막내아들 톨루이(Tolui)의 말자이다. 어머니는 소르학타니로 헤레이드 부 옹칸의 동생인 자하감부의 딸이다.

활동 사항

1259년 여름에 몽골제국 제4대 대칸이자 아릭부케의 큰형인 뭉케([蒙哥], Möngke)가 남송 원정 중에 사망함으로써 계승 문제를 두고 그의 동생들인 쿠빌라이와 아릭부케 사이에 대결이 벌어졌다. 몽골의 수도 카라코룸에 있던 아릭부케는 원정에 나선 뭉케 칸으로부터 몽골 본토를 관리할 전권을 위임받은 사람[留守]으로서 뭉케칸의 장례절차를 주관하여 쿠릴타이(khuriltai: 몽골 및 북방 유목민들 사이의 합의제도)를 소집하는 등 대칸에 오를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뭉케와 함께 남송 원정 중이던 첫째 동생 쿠빌라이는 먼저 남송의 악주(鄂州)를 공격한 후 1259년 군대를 돌려 북상하여 오늘날 내몽골 지역에 들어서 1260년 음력 3월에 자신의 본거지였던 개평부(開平府)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대칸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자 아릭부케도 그다음 달에 카라코룸 일대에서 뭉케파 대신들과 주치·차가타이·우구데이 가문 등 주로 몽골제국 서방의 여러 왕가 제왕들을 모아 쿠릴타이를 열고 대칸으로 즉위하였다.

이로써 몽골제국에는 2명의 대칸이 들어서게 되었다. 몽케의 장례를 치르고, 수도 카라코룸에서 즉위한 아릭부케가 대칸으로서의 정통성은 확보한 셈이었으나, 쿠빌라이 역시 아릭부케를 반란자로 칭하며 자신이야말로 정당한 대칸이라고 주장하였다.

1260년 가을 바스키(Baski)에서 벌어진 양측의 첫 번째 전투에서 아릭부케 측이 패배하였으나 1261년 여름에 반격을 하여 카라코룸을 수복하여 쿠빌라이군을 퇴각시켰다. 또한 1261년 11월 시물토노르 전투에서는 쿠빌라이가 승리하였으나, 조금 후에 벌어진 시레겐 타군 전투는 승자도 패자도 없이 끝나는 등 몇 차례에 걸친 군사충돌이 있었지만 승패가 나지 않았다.

아릭부케는 서북쪽 몽골의 오이라트 등 여러 세력의 지원을 얻어 저항을 계속하는 동시에 군사적 대결에 필요한 병력과 물자의 확보를 위해 차가다이 가문이 통치하는 중앙아시아 자원에 크게 의존하였다. 그러나 차가다이 가문의 수장 알구(Alγu)가 배신하여 그로부터의 물자 공급이 끊어지자 아릭부케는 그를 응징하기 위하여 중앙아시아로 향하였다. 하지만 알구를 치는 과정에서 추종자들을 잃고 고립되었다. 결국 1264년 쿠빌라이에게 항복하였고 2년 뒤인 1266년에 병사하였다. 사서에서는 이 계승 분쟁을 승리자 쿠빌라이를 정통으로 보는 입장에서 ‘아릭부케의 난’이라고 불렀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왕조실록』에서 아리가가 확인되는데 “몽골의 홀필렬(忽必烈, [쿠빌라이])이 군사를 거느리고 밖에 있을 때에 헌종(憲宗)이 죽으니, 여러 왕들이 아리가를 세우자 하였다(『중종실록』 16년 8월 3일)”는 기록이 있다.

참고문헌

  • 『원사(元史)』
  • 김호동, 『몽골 제국과 고려』,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7.
  • Ж. Ганболд, Т. Мөнхцэцэг, Д. Наран, А. Пунсаг,Монголын Юань улс, Адмон, 2006. (J. 강볼드. T. 뭉흐체첵, D. 나랑, A. 폰삭, 『몽골의 원나라』, 애드몬, 2006.)
  • Ш. Нацагдорж, Хубилай сэцэн, 1998. (Sh. 나착도르지, 『쿠빌라이 세첸』, 1998.)
  • ШУА-ийн Түүхийн хүрээлэн, Монгол улсын түүх, Адмон, 2003. (몽골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 편, 『몽골국 역사』, 애드몬, 2003.)

관계망

[[분류:몽골[蒙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