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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용어|대표표제=안국사|한글표제=안국사|한자표제=安國寺|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호국사(護國寺), 적상산(赤裳山),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 묘향산사고(妙香山史庫), 선원각(璿源閣), 의겸(義謙), 공명첩(空名帖),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분야=문화/종교/불교|유형=개념용어|지역=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 적상산(赤裳山)|시대=고려후기~현대|왕대=|집필자=한상길|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4491|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zc_10406019_002 『순종실록부록』 4년 6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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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대표표제=안국사|한글표제=안국사|한자표제=安國寺|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관원[關ヶ原] 전투, 덕천가강(德川家康), 사승(使僧), 임진왜란(壬辰倭亂), 천악[賤ヶ岳] 전투, 풍신수길(豊臣秀吉)|분야=정치/군사·국방/전쟁|유형=인물|지역=일본|시대=조선/안토도산(安土桃山)|왕대=조선/안토도산(安土桃山)|집필자=이세연|이칭=아명: 죽약환竹若丸, 진왕환(辰王丸), 호: 일임재(一任齋), 법호: 정경(正慶), 요보(瑤甫), 법명: 혜경(惠瓊)|성별=남성|생년=1539년|몰년=1600년 11월 6일|본관=|출신지=안예국(安藝國)|관력=안예국 안국사 주지, 동복사(東福寺) 주지, 남선사(南禪寺) 주지|가족관계=부 : 무전신중(武田信重)|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5551|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na_13404025_011 『선조실록』 34년 4월 25일]}}
  
조선시대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를 관리하던 사찰로,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에 위치한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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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도산(安土桃山) 시대의 선승이자 정치가.
  
 
=='''개설'''==
 
=='''개설'''==
  
안국사(安國寺)는 고려후기에 창건되었으나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고, 조선후기에 적상산(赤裳山)에 [[사고(史庫)]]가 건립되면서 국가의 지원과 보호를 받았다. 사고를 관리하는 관서가 있었지만 실제 관리는 절이 전담하였다. 국가에서 여러 차례 [[공명첩(空名帖)]]을 지급하거나 지방 관청을 통해 절의 중건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사고의 수호사찰로서 절은 고역을 맡았지만 이로 인해 억불의 사회에서 절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10년 사고가 폐지된 후 일부 건물을 절로 옮겼다. 1989년 산중에 양수발전소가 건립되면서 원래의 자리는 수몰되었고, 남쪽으로 1㎞ 거리인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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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도산 시대의 대표적인 외교승인 사승(使僧) 가운데 한 명이다. 애초에는 모리씨(毛利氏)의 측근으로 활약했으며, 모리씨가 풍신수길(豊臣秀吉)에게 복속한 뒤로는 수길의 가신으로서 활약하였다. 수길 사후에는 덕천씨(德川氏)에 반대되는 태도를 취하여, 1600년의 관원[關ヶ原] 전투에서도 서군 진영에 가담하였다. 전후에 사로잡혀 경도(京都) 육조(六條) 강가에서 처형되었다.
  
=='''내용 및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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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
  
(1) 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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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사의 부친 무전신중(武田信重)은 안예국의 은산성주(銀山城主)였다. 무전씨(武田氏)는 청화천황으로부터 원성(源姓)을 하사받은 일족인 청화원씨(淸和源氏)에서 갈라져 나온 가문이다. 갑비국(甲斐國)의 종가 외에도 일찍이 안예국, 약협국(若狹國), 상총국(上總國) 등에 분가가 산재하였다. 안국사의 부친 신중은 안예 무전씨의 후예로 그 가계는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후기인 1277년(고려 충렬왕 3)에 월인(月印)이 창건하였다. 하지만 그때의 사세나 역사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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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사항'''==
  
(2)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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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1년 은산성이 모리씨에게 함락되었을 때 안예국 안국사로 피신하였다. 안국사라는 호칭은 이 안예국 안국사로의 피신과 장기체류에서 비롯되었다. 1553년에 이르러 동복사(東福寺) 축운혜심(竺雲惠心)의 제자가 되었으며, 혜심을 통해 모리씨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모리씨의 중국(中國) 지방 제패 과정에서는 니자씨(尼子氏), 대우씨(大友氏)와의 화평교섭에 임했다. 1573년에는 장군 족리의소(足利義昭)와 직전신장(織田信長)의 불화를 조정하기 위해 경도로 향했는데, 이때 목하등길랑수길(木下藤吉郞秀吉), 즉 훗날의 풍신수길과도 접촉하였다. 당시 신장의 몰락과 수길의 도약을 예언하는 문장을 남긴 것은 저명한 사실이다. 1583년 천악[賤ヶ岳] 전투를 계기로 모리씨가 수길에게 신종하자, 이후 수길의 가신으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소조천륭경(小早川隆景)이 이끄는 육번대(六番隊) 소속으로 종군하였는데, 곽재우가 이끄는 의병에 의해 전라도 지역 공격이 좌절되기도 하였다. 1592년 8월에는 금산에서 조헌과 영규가 이끄는 의병과 격돌하였는데, 이때는 조선 의병이 패배하였다. 수길 사후에는 석전삼성(石田三成) 등과 연계하여 덕천가강(德川家康) 타도를 도모하였다. 1600년 관원 전투에서 패하여, 전후에 처형되었다. 안국사 몰락의 사정은 일본에서 포로생활을 하다 도망쳐 온 강사준, 여진덕의 보고에서도 엿볼 수 있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3404025_011 『선조실록』 34년 4월 25일]).
  
조선초에 무학(無學) 대사(大師)가 태조의 명에 따라 국가의 만년지계를 도모할 복지(卜地)로 삼아 중창하였다고 전한다. 절이 위치한 적상산에는 고려말 최영(崔瑩)이 외적의 침입을 대비해 쌓은 적상산성이 있어 이러한 창건설을 뒷받침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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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절의 역사는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와 맥락을 같이한다. 1614년(광해군 6) 산성 안에 실록전(實錄殿)을 건립하여 국가의 사서를 보관하는 적상산사고를 두었다. 원래 묘향산사고(妙香山史庫)에서 사서를 보관하였으나 후금(後金)의 위협 등으로 도서가 망실(亡失)될 우려가 있었다. 이에 1618년(광해군 10)부터 1633년(인조 11)까지 묘향산사고의 실록을 모두 이전하였다. 이때부터 절은 사고 수호사찰이 되었고, 주지 덕웅(德雄)이 의승을 모집하여 산성을 보수하면서 사고를 지켰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는 사고를 지킬 사람이 없자 상훈(尙訓)이 사서를 모두 성 밖의 안전한 석굴로 옮겼다가 전쟁이 끝나자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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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도시(京都市) 건인사(建仁寺) .
 
 
1728년(영조 4)에는 조선후기의 대표적 화승 의겸(義謙) 등이 괘불(보물 제1267호)을 조성하였다. 1758년(영조 34) 감로탱화를 조성하였고, 1772년(영조 48)에는 극락전에 후불탱화를 봉안하였다. 1817년(순조 17)에는 절의 중수 방안을 모색하라는 왕명이 있었다. 당시 절은 사고의 장서를 관리하는 제반 작업을 모두 전담하는 관청과도 같은 기능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사찰 전각이 낡아 무너질 지경에 처하자 지방 관청에 명하여 중수 대책과 절의 잡역을 감면해줄 방안을 찾으라고 하였다. 1850년(철종 1)에도 공명첩 300장을 내려 절의 중수를 돕도록 하였다. 1864년(고종 1)에는 이면광(李冕光)이 절의 중수를 왕실에 건의하였다. 이에 대왕대비가 공명첩 300장을 관청에 보내 경비를 모아 중수하도록 하였다. 이때의 사실을 「안국사중수기」라는 현판에 남겼다. 이후 1872년(고종 9)과 1902년에도 중수가 이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명부전과 산신각, 청하루(淸霞樓), 승방 등이 있었다. 1910년 적상산사고의 장서가 서울 장서각으로 옮겨갔다. 당시 장서는 4,066책이었으나([http://sillok.history.go.kr/id/kzc_10406019_002 『순종실록부록』 4년 6월 19일]), 안타깝게도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모두 분실되고 말았다. 사고에 남아 있던 [[선원각(璿源閣)]]을 비롯한 빈 건물은 주지 이철허(李澈虛)가 경내로 옮겼다.
 
 
 
(3)현대
 
 
 
현대에 들어 1968년 주지 유정환(柳正煥)이 선원각에 천불상을 봉안하였고, 퇴락한 청하루를 해체하였다. 1989년 산내에 무주 양수발전소가 건립되면서 절이 수몰 지구에 포함되었다. 부득이 남쪽으로 1㎞ 떨어진 호국사(護國寺)로 옮기게 되었다. 호국사는 빈터만 남아 있었는데 이곳에 극락전, 천불전, 호국당 등 대부분의 전각을 이전·복원하였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박대길, 「적상산사고의 설치운영과 무주의 변화」, 『전라문화총서』27, 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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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7.     
*사찰문화연구원 편집부, 『전통사찰총서 8, 전북의 전통사찰Ⅰ』, 사찰문화연구원,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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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歷史地名大系』, 平凡社,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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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合政治, 『安國寺惠瓊』人物叢書, 吉川弘文館, 1989.       
  
 
=='''관계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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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문화]][[분류:종교]][[분류:불교]][[분류:개념용어]][[분류: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 적상산(赤裳山)]][[분류:고려후기~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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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정치]][[분류:군사·국방]][[분류:전쟁]][[분류:인물]][[분류:일본]][[분류:조선/안토도산(安土桃山)]][[분류:조선/안토도산(安土桃山)]]

2017년 12월 22일 (금) 01:15 판




안토도산(安土桃山) 시대의 선승이자 정치가.

개설

안토도산 시대의 대표적인 외교승인 사승(使僧) 가운데 한 명이다. 애초에는 모리씨(毛利氏)의 측근으로 활약했으며, 모리씨가 풍신수길(豊臣秀吉)에게 복속한 뒤로는 수길의 가신으로서 활약하였다. 수길 사후에는 덕천씨(德川氏)에 반대되는 태도를 취하여, 1600년의 관원[關ヶ原] 전투에서도 서군 진영에 가담하였다. 전후에 사로잡혀 경도(京都) 육조(六條) 강가에서 처형되었다.

가계

안국사의 부친 무전신중(武田信重)은 안예국의 은산성주(銀山城主)였다. 무전씨(武田氏)는 청화천황으로부터 원성(源姓)을 하사받은 일족인 청화원씨(淸和源氏)에서 갈라져 나온 가문이다. 갑비국(甲斐國)의 종가 외에도 일찍이 안예국, 약협국(若狹國), 상총국(上總國) 등에 분가가 산재하였다. 안국사의 부친 신중은 안예 무전씨의 후예로 그 가계는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활동 사항

1541년 은산성이 모리씨에게 함락되었을 때 안예국 안국사로 피신하였다. 안국사라는 호칭은 이 안예국 안국사로의 피신과 장기체류에서 비롯되었다. 1553년에 이르러 동복사(東福寺) 축운혜심(竺雲惠心)의 제자가 되었으며, 혜심을 통해 모리씨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모리씨의 중국(中國) 지방 제패 과정에서는 니자씨(尼子氏), 대우씨(大友氏)와의 화평교섭에 임했다. 1573년에는 장군 족리의소(足利義昭)와 직전신장(織田信長)의 불화를 조정하기 위해 경도로 향했는데, 이때 목하등길랑수길(木下藤吉郞秀吉), 즉 훗날의 풍신수길과도 접촉하였다. 당시 신장의 몰락과 수길의 도약을 예언하는 문장을 남긴 것은 저명한 사실이다. 1583년 천악[賤ヶ岳] 전투를 계기로 모리씨가 수길에게 신종하자, 이후 수길의 가신으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소조천륭경(小早川隆景)이 이끄는 육번대(六番隊) 소속으로 종군하였는데, 곽재우가 이끄는 의병에 의해 전라도 지역 공격이 좌절되기도 하였다. 1592년 8월에는 금산에서 조헌과 영규가 이끄는 의병과 격돌하였는데, 이때는 조선 의병이 패배하였다. 수길 사후에는 석전삼성(石田三成) 등과 연계하여 덕천가강(德川家康) 타도를 도모하였다. 1600년 관원 전투에서 패하여, 전후에 처형되었다. 안국사 몰락의 사정은 일본에서 포로생활을 하다 도망쳐 온 강사준, 여진덕의 보고에서도 엿볼 수 있다(『선조실록』 34년 4월 25일).

묘소

경도시(京都市) 건인사(建仁寺) 내.

참고문헌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7.
  • 『日本歷史地名大系』, 平凡社, 2005.
  • 河合政治, 『安國寺惠瓊』人物叢書, 吉川弘文館,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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