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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15 기준 최신판




대마번 종씨의 가신.

개설

1678년(숙종 4) 초량왜관 이전 후 왜관의 통제와 체제 정비를 위하여 동래부사이복과 관수(館守)가 협의하여 조시약조(朝市約條)를 체결하였다. 이듬해 귤성진이 조선에 파견되어 1679년(숙종 5) 동래부사이서우(李瑞雨), 왜관의 관수와 이에 관하여 상의하였다. 이후 왜관 경계를 측량하고 금표(禁標)가 세워졌다.

활동 사항

1672년(헌종 13) 대마도주(對馬島主) 평의진(平義眞)이 강호(江戶)에 들어갔다가 대마도로 돌아왔다고 차왜 귤성진을 보내어 조선에 보고하였다. 조선의 예조에서는 귤성진 편에 왜관 이전을 요구하며 일본인이 왜관을 뛰쳐나오는 등 횡포를 부린 일에 대하여 평의진을 꾸짖는 글을 보냈다(『현종실록』 13년 6월 19일).

1679년(숙종 5) 귤성진은 차왜로 파견되어 동래부사와 관수와 왜관 경계와 관련하여 상의를 하였다. 그 후 왜관 경계를 측량하고 금표가 세워졌는데, 그 경계는 동쪽으로는 송현(松峴)에 이르기까지 왜관과의 거리가 300보쯤 되며, 서쪽으로는 서산(西山)에 이르기까지 80보쯤 되고, 서남쪽으로는 초량(草梁) 민가로부터 100보쯤 되며, 남쪽으로는 100보쯤 거리에 바다가 있었다.

참고문헌

  •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