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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초 몽골의 대칸.

개설

본아실리는 몽골어 본야시리(Buniyasiri)를 한자로 음차 표기한 것으로, 울제이 테무르(Öljei Temür)라고도 하였다. 어렸을 때 내란을 피하여 중앙아시아티무르제국에서 한동안 살았다. 1408년 구일리치([鬼力赤], Guilichi) 칸이 죽자 태사(太師)아룩타이([阿魯台], Aruγtai)가 본야시리를 베쉬발릭([別失八里], Beshbalik)에서 맞아들여 대칸으로 옹립하였다.

가계

부는 엘벡 칸(Elbeg Khan), 조부는 투구스 테무르 칸이다. 형은 군 테무르([坤帖木兒], Güntemür)이다.

활동 사항

1409년에 본야시리는 오이라트의 습격을 받아 패퇴하여 아룩타이와 함께 헤를렌(Kerülen) 강으로 옮겨 가 지내고 있었다. 그때 명나라 사신 곽기(郭驥)를 살해하여 영락제의 분노를 사 공격을 받았으나, 맞서 싸워 명나라 100,000대군을 몰살시켰다.

그러나 이듬해인 1410년 영락제가 이끄는 500,000대군과 오이라트(Oyirad) 군대가 연합하여 다시 공격해 오자 본야시리는 서쪽으로 도망쳐 결국 오이라트로 들어갔으나 2년이 지나 오이라트의 마하무에게 살해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왕조실록』에는 명나라가 북벌 성공담을 조선에 전한 조서에서 본아실리를 언급하고 있다. 영락제가 “호구(胡寇) 본아실리(本雅失里)와 만나 싸워 곧 이를 패퇴시켰다. 달아나는 것을 쫓고 패퇴하는 것을 쫓아, 번개처럼 쓸고 우뢰처럼 내몰았다. 본아실리가 달아나기에 여념이 없어 겨우 7기(騎)만으로 도망하였다(『태종실록』 10년 7월 11일)”고 하였다.

참고문헌

  • 동북아역사재단 편, 『명사 외국전 역주(明史 外國傳 譯註)』, 동북아역사재단, 2012.
  • Эрдэнэ тунамал нэртшастир, Соёмбо принтинг, 2006. (『에르데니 투누말이라는 역사』, 소욤보 프린팅, 2006.)
  • Шар тууж, Соёмбо принтинг, 2006.(『대황사(大黃史)』, 소욤보 프린팅, 2006.)
  • Саган сэцэн, Эрдэнийн товч, Улсын хэвлэлийн газар, 1961. (사강 세첸, 『몽골원류[蒙古源流]』, 국립출판사, 1961.)
  • ШУА-ийн Түүхийн хүрээлэн, Монгол улсын түүх, Адмон, 2003. (몽골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 편, 『몽골국 역사』, 애드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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