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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15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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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귀영개 |
한글표제 | 귀영개 |
한자표제 | 貴永介 |
관련어 | 건주여진(建州女眞), 귀영가(貴盈哥), 누르하치([奴兒哈赤], nurhaci), 병자호란(丙子胡亂) |
분야 | 정치/외교/외교사안 |
유형 | 인물 |
지역 | 만주 |
시대 | 후금~청/조선 |
왕대 | 후금~청/조선 |
집필자 | 이선애 |
이칭(자,호,봉작호,시호) | 구영바투루([古英巴圖魯], guyeng baturu), 암바버일러([大貝勒], amba beile), 예친왕(禮親王), 예열친왕(禮烈親王) |
성별 | 남 |
생년/일 | 1583년 |
몰년/일 | 1648년 |
출신지 | 건주여진(만주) |
관력 | 버일러[beile, 貝勒]([貝勒], beile), 호쇼 친왕(和碩親王) |
가족관계(부,조,외조[모], 장인[처], 형제) | 부: 누르하치[奴兒哈赤],([奴兒哈赤], nurhaci), 모: 퉁기야[tunggiya, 佟佳]씨([佟佳], tunggiya)씨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귀영개(貴永介)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인조실록』 24년 6월 3일, 『광해군일기』 11년 7월 22일, 『광해군일기』 11년 12월 17일, 『광해군일기』 13년 8월 28일, 『광해군일기』 13년 9월 9일, 『인조실록』 5년 3월 18일, 『광해군일기』 13년 9월 17일, 『인조실록』 9년 윤11월 23일 |
청 태조누르하치의 둘째 아들 다이샨([代善], daišan)의 한자 이름.
개설
다이샨은 건주여진이 흥기하던 초기부터 누르하치([奴兒哈赤], nurhaci)를 도와 많은 공을 세웠고, 이후에 아민([阿敏], amin), 망굴타이([莽古爾泰], manggūltai), 홍타이지([皇太極], hongtaiji)와 함께 4대 버일러([貝勒], beile)의 하나가 되어 암바버일러로 불리었다. 정홍기(正紅旗)의 수장이기도 하였으며 후금 시기에 주력군을 이끌고 활동하여 전공이 많았다. 인품과 처세술이 뛰어나 홍타이지([皇太極], hongtaiji)가 한(汗, [칸])으로 등극한 이후에 또 다른 권력자였던 아민이나 망굴타이와는 달리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조선에서는 다이샨을 귀영개, 귀영가(貴盈哥) 등으로 표기하였는데, 이는 1607년에 전공을 세워 구영바투루([古英巴圖魯], guyeng baturu) 라는 호칭을 받은 데에서 유래하였다. 실록에는 다이샨을 대왕(大王)이라고 표기하기도 하는데(『인조실록』 24년 6월 3일), 이는 그의 다른 호칭인 암바버일러([大貝勒], amba beile)를 의미하였다.
가계
다이샨은 누르하치의 둘째 아들로 원비(元妃) 퉁기야([佟佳], tunggiya) 씨 소생이었다. 아들로는 요토([岳托], yoto), 쇼토([碩託], šoto), 사할리연([薩哈璘], sahaliyen), 왁다([瓦克達], wakda) 등 여러 명을 두었다. 그 밖에 호호리([何和禮], hohori)의 넷째 아들 호쇼투([和碩圖], hošotu)에게 시집보낸 딸이 있었다.
활동 사항
다이샨은 1607년 숙부인 슈르가치([舒爾哈齊], šurgaci), 동복형 추영([褚英], cuyeng)과 함께 동해여진 와르카([瓦爾喀], warka)의 피오성에서 귀부한 사람들을 호송하는 도중에 부잔타이([布占泰], bujantai)가 보낸 울라의 군사와 조우하여 격파하였다. 그는 이 전투의 공로를 인정받아 구영바투루라는 호칭을 받았다. 1613년에는 누르하치의 울라 정벌에 종군하여 3개의 성을 함락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1619년 (심하(深河) 지역 사르후([薩爾滸], sarhū)) 전투에서는 다이샨이 후금군의 주력을 이끌고 활약하였고, 심하에서 조선과 명의 연합군을 격파하기도 하였다. 조선군 도원수강홍립(姜弘立)이 군사를 거느리고 항복하자 그를 예우하였다(『광해군일기』 11년 7월 22일). 이후에도 수차례에 걸쳐 조선에 대한 전략적인 유화 정책의 중요성을 피력하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 11년 12월 17일)(『광해군일기』 13년 8월 28일)(『광해군일기』 13년 9월 9일). 이러한 다이샨의 태도로 인하여 조선은 그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인조실록』 5년 3월 18일). 조선은 다이샨 대신에 타이지가 권력을 잡았다는 소식에 당황하였고(『광해군일기』 13년 9월 17일) 같은 이유로 조선은 홍타이지가 한으로 등극한 이후 다이샨과의 내분이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하였다(『인조실록』 9년 윤11월 23일).
다이샨은 1621년 아민·망굴타이·홍타이지와 함께 4대 버일러에 올랐고, 이복동생 홍타이지를 한으로 추대하였으며, 홍타이지 시기에 그의 보좌역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636년 홍타이지가 청을 세우고 황제로 등극하자, 호쇼이[和碩] 도롱고 아훈 친왕([禮兄親王], hošoi doronggo ahūn cin wang)이라는 호칭을 받았다. 다이샨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홍타이지와 함께 청군의 우익군(右翼軍)을 거느리고 조선을 침공하기도 하였다. 다이샨은 순치제(順治帝)가 등극할 때까지 천수를 누렸으며, 1648년 66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하였다.
상훈 및 추모
다이샨이 죽자 순치제는 은 10,000냥을 내려 장사하게 하였고, 비석을 세워 공적을 기록하였다. 1671년 강희제(康熙帝)는 그에게 열(烈) 자를 시호(諡號)에 더하고 예열친왕(禮烈親王)이라 하고 비석을 다시 세워 그를 기렸다.
참고문헌
- 『청사고(淸史稿)』
- 『만문노당(滿文老檔)』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만주학센터, 『만주실록 역주』, 소명출판, 2014.
- 梅曉瑩, 「淸初功臣代善事迹述評」, 『東華大學學報』, 2006(2期).
- 陳涴, 「代善」, 『遼寧省社會科學普及系列叢書』 9, 遼寧社會科學院歷史硏究所, 2012.
- Arthur W. Hummel, Eminent Chinese of the Ch'ing Period(1644~1912), Ch’eng Wen Publishing Company,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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