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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제2군을 지휘하여 조선을 침략한 장수.

개설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측근 장수로서 그를 따라 많은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때에는 제2군의 장수로 조선을 침략했다. 한성에 입성한 후 함경도로 전진하여 조선의 왕자를 인질로 사로잡았다. 강화교섭기에는 울산에 주둔하면서 조선의 사명대사유정(惟政)과 교섭하기도 했다. 강화교섭 결렬 후 조선을 다시 침략했다. 조명연합군이 그의 진지 울산성을 공격한 울산성 전투(도산성 전투)에서 고전하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벌어진 관원[關が原] 전투 때에는 덕천가강(德川家康)의 동군에 속하여 구주에서 소서행장(小西行長)의 성을 공격했다. 소서행장에게 강한 경쟁심을 품고 있었으며 두 사람은 임진왜란과 관원 전투 때까지 지속적으로 갈등관계에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자신의 영지 구주(九州) 웅본(熊本) 지역에서는 축성술과 치수로 이름을 남겼다.

가계

활동 사항

가등청정은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났고 부친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의 모친이 풍신수길 모친의 친척이었기에 풍신수길과 인연을 맺었고 수길의 휘하에서 무장으로 키워졌다. 풍신수길을 따라 많은 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1586년 구주 공격에도 참전하였으며 구주의 비후(肥後) 지역을 소서행장과 나누어 그 절반을 영지로 하사받았고, 웅본성에 거처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제2군의 장수로서 과도직무(鍋島直茂), 상양뢰방(相良賴房)과 함께 조선을 침략했다. 가등청정은 1만 명의 병력을 인솔하고 있었다. 제2군은 4월 18일 부산에 상륙하여 5월 3일에 한양에 입성했고 5월 29일에 개성까지 진출했다. 6월 초순 가등청정은 과도직무와 함께 함경도로 향했다. 이는 평안도 외에 명으로 향하는 다른 길을 찾고 이러한 과정에서 전공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6월 17일 함경도 안변에 도착한 그는 7월 18일~19일에 해정창에서 함경북병사 한극함(韓克緘)이 이끄는 조선군과 싸워 이겼다. 이후 북진을 계속하여 7월 24일에는 회령에서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와 일행을 사로잡았다. 이때 회령 사람 국경인(鞠景仁) 무리가 조선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들이 왕자 일행을 사로잡은 후 가등청정에게 바쳤던 것이다(『선조수정실록』 25년 7월 1일). 그는 후일 선조에게 사람을 보내 조선 영토 할양을 조건으로 교섭을 요구하기도 했다(『선조실록』 25년 10월 19일).

7월 말, 두만강을 넘어 여진족이 거주하는 구역까지 진입하였다가 8월에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여진족이 그를 막아섰을 뿐만 아니라, 이쪽 길을 통해서는 명으로 향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9월에 안변에 도착하여 이곳을 본진으로 삼았고, 부하들을 북청, 이성, 단천, 길주 등지에 주둔시켰다.

그는 함경도에 진입한 직후부터 주둔지 주변의 조선인들로부터 세금을 걷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조선인들은 그에게 협조하지 않고 산으로 도망치거나 왕래하는 일본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0월부터 가등청정이 병력을 나누어 배치한 길주 등지에서는 정문부가 지휘하는 조선 의병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그는 부하들에게 성을 버리고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일본군은 이조차 따를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이 사로잡은 왕자를 과도직무에게 맡겨두고 직접 구원에 나섰고 퇴각하는 병사들을 수습한 후 안변으로 돌아왔다(『선조수정실록』 26년 1월 1일). 정문부 등 조선 의병이 가등청정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내용은 후일 『北關大捷碑』 등에 기록되어 후대에 전해졌다.

이즈음 평양에 있던 소서행장의 부대가 명의 대군의 공격을 받아 한성까지 퇴각했고, 일본군들은 한성에 모여 명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가등청정과 과도직무도 함경도에서 철수하여 1593년 2월 말, 한성으로 들어왔다. 한성에서는 이미 소서행장을 중심으로 명군과의 강화교섭이 진행 중이었다. 청정은 자신을 제외하고 진행되고 있던 논의에 불만을 품었으며, 풍신수길에게 강화교섭을 추진하던 이들을 비난하는 내용의 서장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풍신수길은 강화교섭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가등청정에게 직접 명령을 내려 강화교섭 시작의 증거로 청정이 사로잡은 두 왕자를 조선에 돌려보내게 하였다. 청정은 자신의 자랑스러운 전공으로 여기고 있던 왕자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선조실록』 26년 7월 15일). 그는 이후 벌어진 진주성 전투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임했는데, 눈에 띄는 전공을 다시 얻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후 가등청정은 울산에 주둔하게 되었다. 강화교섭에서 사실상 소외되어 있었던 그는 다른 방법을 통해 경쟁자 소서행장을 앞서고자 했고, 조선과 명군 측에 강화교섭을 요구했다(『선조실록』 27년 2월 21일). 조선에서는 의승장 사명대사 유정을 파견하여 교섭에 임했다. 가등청정과 유정의 회담은 1594년 4월에서 12월까지 세 차례, 그리고 1597년 3월에 한 차례, 총 네 차례 행해졌다. 그는 소서행장과 심유경 사이에서 진행되던 강화교섭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고, 유정과의 회담에는 자신이 강화교섭의 주도권을 빼앗아 오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교섭은 양측의 의견 차이가 커 가시적인 성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1596년 5월에 일본으로 귀환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소서행장 등으로부터 강화교섭의 방해자로 고발되어 풍신수길의 명령에 의해 소환되었다는 설이 있다. 1596년 9월 강화교섭이 결렬되자 곧바로 자신의 영지로 향하여 전쟁 준비에 착수하였고 1597년 1월, 다른 장수들보다 빨리 조선으로 와서 울산, 서생포 왜성 등을 개축하며 전쟁 준비에 착수했다. 한편으로 유정과 다시 만나 전쟁 재발을 막는다는 명목하에 조선의 왕자를 일본에 인질로 보내라는 요구를 하기도 했다(『선조실록』 30년 3월 30일).

1597년 7월, 풍신수길의 전투 명령이 내려지자 직산까지 전진하였다가 명군과 일전을 벌인 후 주둔지로 남하하였다. 이후 전투 행위를 중지하고 축성에만 전념했다.

1597년 12월, 명군 지휘관 양호 이하의 명군과 조선군이 연합하여 울산성을 공격하였다. 서생포에 있던 청정은 포위된 울산성에 진입하여 농성전에 돌입하였다. 이듬해 1월까지 포위 공격이 계속되었고 청정은 항복 직전까지 내몰렸다. 그러나 일본군이 구원을 위해 모여들면서 오랜 포위에 지쳐 있던 명군은 후퇴를 결정하였다(『선조실록』 31년 1월 1일)(『선조실록』 31년 1월 6일)(『선조수정실록』 30년 12월 1일). 이 전투 당시 완공되지 않았던 울산성에는 우물이 부족하여 농성 중에 고난을 겪었다. 임진왜란 후 웅본성에 많은 우물을 만든 것은 그때의 경험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후 명군 제독마귀(麻貴)와 대치하였으나 이전과 같은 큰 규모의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1598년 9월 일본에서 철수 명령이 내려지자 11월 말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1600년 9월에 벌어진 일본의 내전인 관원 전투 당시 동군에 속했다. 가등청정을 비롯한 무장들은 서군에 속한 석전삼성(石田三成), 소서행장 등과 오랜 갈등 관계에 있었다. 전투 당시 그는 주요 전장인 관원이 아니라 구주의 영지에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소서행장의 영지로 진격하여 공격을 시작하였다. 전투가 동군의 승리로 끝나고 소서행장의 영지는 가등청정의 소유가 되었다.

관원 전투 이후 일본의 정권은 덕천가강에게 넘어갔다. 가등청정은 풍신 가문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하고 있었고, 풍신수길의 아들인 풍신수뢰(豊臣秀賴)의 안전을 위해 힘을 다했다. 1611년 이조성(二条城)에서 있었던 덕천가강과 풍신수뢰의 회견에 동행했다가 영지로 돌아오던 중 병이 생겼고 이로 인해 사망했다.

가등청정은 매우 세심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조선 침공 후 자신의 군대가 어려운 일에 처할 때마다 영지에 서장을 보내 빈번히 인력과 물자 보충을 요구하였다. 자신이 전공을 올릴 때마다 풍신수길에게 보고하였고 그 속에서 다른 이들을 비방하기도 했다. 강화교섭기에도 부하들에게 끊임없는 임전태세 유지를 강조했다. 이 때문에 그의 진영에서는 자주 도망자가 발생했다. 이들 중에는 조선에 투항한 자를 뜻하는 항왜(降倭)도 적지 않았으며, 가등청정 암살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선조실록』 28년 2월 29일). 일본 내에서는 축성과 치수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장수로도 알려져 있다.

묘소

일본 구주 웅본현(熊本縣) 웅본시(熊本市) 본묘사(本妙寺).

참고문헌

  •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
  •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 『농포집(農圃集)』
  • 『하천문서(下川文書)』
  • 『구귀문서(九鬼文書)』
  • 『가등청정가장문서(加藤淸正家藏文書)』
  • 『가등청정문서집(加藤淸正文書集)』
  • 『청정고려진각서(淸正高麗陣覺書)』
  • 『청정기(淸正記)』
  • 『가등가전청정공항상(加藤家傳淸正公行狀)』
  • 김경태, 「임진전쟁 전반기,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동향 -전공(戰功)의 위기와 강화교섭(講和交涉)으로의 가능성」, 『대동문화연구』77,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2.
  • 김만호, 「임진왜란기 일본군의 함경도 점령과 지역민의 동향」, 『역사학연구』 38, 호남사학회, 2010.
  • 김문자, 「임진왜란기 일·명 강화교섭의 파탄에 관한 일고찰:사명당·가등청정 간의 회담을 중심으로」, 『정신문화연구』 28-3, 한국학중앙연구원, 2005.
  • 김문자, 「임진왜란기의 강화교섭과 가등청정:조선왕자의 송환문제를 중심으로」, 『한일관계사연구』42, 한일관계사학회, 2012.
  • 김시덕, 「근세 일본 임진왜란 문헌군에 보이는 함경도 지역의 의병 활동에 대하여 -『기요마사 고려진 비망록』의 분석을 중심으로」, 『한일군사문화연구』12, 한일군사문화학회, 2011.
  • 北島萬次, 『加藤淸正』, 吉川弘文館, 2007.
  • 中野等, 「唐入り(文祿の役)における加藤淸正の動向」, 『九州文化史硏究所紀要』56, 201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