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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14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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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낙상지 |
한글표제 | 낙상지 |
한자표제 | 駱尙志 |
관련어 | 『기효신서(紀效新書)』, 낙천근(駱千斤), 무열사(武烈祠), 석성(石星), 이여송(李如松), 임진왜란(壬辰倭亂), 절강병법(浙江兵法) |
분야 | 정치/군사·국방/전쟁 |
유형 | 인물 |
지역 | 대한민국, 중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송양섭 |
이칭(자,호,봉작호,시호) | 호 : 운곡(雲谷) |
성별 | 남 |
출신지 | 절강(浙江) 소흥부(紹興府) 여요현(餘姚縣) |
관력 | 참장(參將), 경영 부총병(京營副摠兵)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낙상지(駱尙志)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수정실록』 26년 9월 1일, 『선조실록』 25년 9월 17일, 『선조실록』 25년 9월 23일, 『선조실록』 26년 1월 11일, 『선조실록』 26년 1월 14일, 『선조실록』 26년 3월 4일, 『선조실록』 26년 3월 12일, 『선조실록』 26년 6월 7일, 『선조실록』 26년 7월 16일, 『선조실록』 26년 11월 6일, 『선조실록』 26년 6월 7일, 『정조실록』 16년 8월 6일, 『정조실록』 16년 9월 18일 |
임진왜란 당시 명군 제독 이여송을 따라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장수.
개설
낙상지는 신장이 7척(약 2m)에 이르고 무예가 뛰어났으며, ‘천 근의 무게를 들 수 있는 힘을 가졌다’ 하여 ‘낙천근(駱千斤)’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1592년(선조 25) 12월 흠차통령절직조병신기영좌참장(欽差統領浙直調兵神機營左參將)이라는 직함으로 보병 3천 명을 인솔하고 조선으로 들어왔다가 1594년 1월에 귀국했다. 낙상지는 용맹함으로 잘 알려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청렴함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또 조선에 협조적인 인물로서 선조와 신료들의 관심을 받았다.
가계
활동 사항
낙상지는 요동총병이성량(李成樑)의 가정(家丁)이었다고 한다(『선조수정실록』 26년 9월 1일). 그는 임진왜란 이전 주로 북방의 대동(大同)에서 활동하여 대동입위유격(大同入衛遊擊), 대동동로좌참장(大同東路左參將) 등을 역임했다.
1592년(선조 25)의 1차 평양성 전투 패배 이후, 참장으로서 남병(南兵)을 이끌고 의주의 대안까지 나와 주둔하였다. 그의 군대는 모두 보병이었는데, 매우 용맹하여 조선에 큰 인상을 주었고, 출병하기 이전에 조선의 부탁을 받아들여 부하들로 하여금 조선군의 교련을 돕기도 했다(『선조실록』 25년 9월 17일)(『선조실록』 25년 9월 23일).
1593년(선조 26) 1월 8일, 명군은 조선군과 함께 세 갈래로 나누어 평양성을 공격했다. 낙상지는 부총병 조승훈(祖承訓), 평안병사 이일(李鎰), 방어사(防禦使) 김응서(金應瑞) 등과 함께 함구문(含毬門)을 공격하였다. 낙상지는 진두에서 지휘하다가 일본군이 던진 돌에 맞아 부상을 입었으나, 그의 군사들은 수백 개의 수급을 얻고 명군의 깃발을 꽂는 등 큰 전공을 올렸다(『선조실록』 26년 1월 11일)(『선조실록』 26년 1월 14일).
낙상지는 평양성 함락 직후, 벽제관에서 참패를 당해 기세가 꺾인 이여송의 태도를 비판하면서 공격을 주장하였다(『선조실록』 26년 3월 4일). 당시 북군(北軍)과 남군(南軍) 사이에는 전공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는데, 이때 낙상지는 자신이 거느린 남군의 보병만으로 적을 토벌하겠다고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조선에서는 양측의 대립을 조장하지 않기 위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를 높이 평가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선조실록』 26년 3월 12일).
이 시점에 강화교섭이 진행되면서 명군의 잔류와 철수가 논의되었고, 경략송응창(宋應昌)은 ‘조선에 머물 장수를 스스로 택하라’고 하였다. 선조는 승정원에 전교하여 유정(劉綎)·오유충(吳惟忠)과 함께 낙상지를 잔류하게 해줄 것을 명 측에 요구했다(『선조실록』 26년 6월 7일).
낙상지는 이해 여름 진주성을 구원하라는 제독이여송의 지시를 받았으나 군세가 약하여 응하지 못했다. 낙상지는 자신이 머물던 남원성을 개축하면서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에 대비했다(『선조실록』 26년 7월 16일). 그는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을 방어하는 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상주와 조령을 거쳐 경주로 들어가서 주둔하면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선조실록』 26년 11월 6일). 그러나 낙상지를 포함한 명군은 군량의 부족을 지속적으로 호소하였고, 결국 병부 상서 석성(石星)이 철병을 지시하게 되었다. 1594년(선조 27) 1월 절강참장(浙江參將)으로 임명되어 떠났다.
낙상지는 조선에 절강병법을 보급하는 데 기여했다. 당시 그의 접반관이었던 이시발(李時發)은 도체찰사유성룡(柳成龍)의 종사관이었는데, 중국어에 능통한 인물이었다. 이들은 낙상지로부터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얻어 해독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훈련도감(訓鍊都監)을 창설하게 된다. 조선에서 낙상지가 머물기를 원했던 이유는 바로 그를 통해서 전법을 보급하기 위해서였다(『선조실록』 26년 6월 7일). 낙상지는 귀국하면서도 자신의 부하들을 남겨 조선군의 훈련을 돕게 했다. 그는 1597년(선조 30) 6월에는 경영(京營)의 신기영(神機營)의 우부장(右副將)으로 승진하였다.
상훈 및 추모
낙상지는 정조 연간에 무열사(武烈祠)에 제향되었다. 무열사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석성, 이여송 등 다섯 명의 장수를 기리기 위해 평양에 세운 사당이다. 1792년(정조 16) 평안도관찰사홍양호(洪良浩)가 개수하였다. 그는 낙상지의 전공을 높이 평가하면서 지위가 낮아 함께 배향되지 못한 점을 애석하게 여기어 무열사에 함께 배향하자고 주장하였다. 정조는 이 의견을 받아들여 위판(位版)과 제문을 내려주었다(『정조실록』 16년 8월 6일) (『정조실록』 16년 9월 18일).
참고문헌
-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
- 『고대일록(孤臺日錄)』
- 『명신종실록(明神宗實錄)』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김경태, 「임진전쟁기 강화교섭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