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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 두만강 유역에 거주한 여진족 추장.

개설

역수(易水)는 선조대에 종성진(鍾城鎭)에 소속된 번호(藩胡) 추장이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4년경 두만강 유역의 번호가 조선에 반발할 때, 이라대(伊羅大)를 따라 종성과 온성 등지를 공격하였다. 특히, 역수의 부락은 험준한 곳에 위치하여 방어에 유리하였다. 역수는 이곳을 중심으로 조선에 반항하였다가 1594년 10월에 조선군에게 멸망당하였다.

활동 사항

임진왜란 이후 두만강 유역의 일부 번호가 조선에 반항하였다. 1594년(선조 27) 7월에 골간올적합(骨看兀狄哈)이 서수라(西水羅)를 공격하자 비변사는 항왜(降倭)를 북방에 보내 이들을 제압하였다. 특히, 온성 번호의 반란이 대표적으로, 같은 해 9월에 함경도관찰사이희득은 번호 이라대 등이 온성을 공격하였다고 보고하였다(『선조실록』 27년 9월 28일). 실제로 이들이 동관 등지를 약탈하자 각 지역의 추장들도 준동하였다.

역수는 영건보(永建堡) 휴악(鵂嶽) 부락(部落)에 이거(移居)한 거추(巨酋)로, 그가 사는 곳은 매우 험준하였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역수의 부락은 북쪽에 석봉(石峯)이 우뚝 솟아 높이가 100장(丈)쯤 되고 삼면은 깎은 듯하여 한 면만이 겨우 발을 붙일 만한 곳에다 석성(石城)을 높이 쌓았다고 한다. 이처럼 방어에 유리한 곳을 거점으로 한 역수는 ‘오랑캐 중에 가장 강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조선에 귀화하지 않은 지 여러 해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영건보 등을 공격하여 조선의 주토(誅討) 대상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역수는 병마가 강하고, 성이 험하기 때문에 쉽게 이룰 수 없었다. 다행히 조선군이 경원의 거추와 다호리(多好里) 등의 부락을 탕멸(蕩滅)한 뒤로 사기가 올라 역수를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함경북도병마절도사정현룡(鄭見龍)은 비밀리에 군사 1,235명과 항왜 25명을 종성에 모이게 한 뒤, 역수의 부락을 포위하였다. 역수는 성을 기반으로 화살과 돌을 쏘고 던지며 반항하였다. 이에 조선군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항왜를 선봉으로 삼아 성을 함락시켰다. 이때 역수 부락은 남녀노소를 포함하여 700~800여 명이 사망하며 패퇴하였다(『선조실록』 27년 10월 11일).

이때의 전투 내용이 간략하게 『선조수정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다만, 여기에는 1594년 10월의 사건을 같은 해 3월로 기재하였다(『선조수정실록』 27년 3월 1일). 그러나 관련 기록과 정황을 검토하면, 『선조실록』의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보인다.

참고문헌

  • 박정민, 『조선시대 여진인 내조 연구』, 경인문화사, 2015.
  • 한성주, 「임진왜란 전후 女眞 藩胡의 朝鮮 침구 양상과 조선의 대응 분석」, 『동양사학연구』 13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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