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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14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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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노아합적 |
한글표제 | 노아합적 |
한자표제 | 奴兒哈赤 |
동의어 | 노을가치(老乙可赤), 노라적(老羅赤), 노가치(老可赤), 노가치(奴可赤) |
관련어 | 노추(奴酋), 노적(奴賊), 노호(奴胡), 여진(女眞), 임진왜란(壬辰倭亂) |
분야 | 정치/외교/외교사안 |
유형 | 인물 |
지역 | 만주 |
시대 | 건주여진~후금 |
왕대 | 건주여진~후금 |
집필자 | 이선애 |
이칭(자,호,봉작호,시호) |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
성별 | 남 |
생년/일 | 1559년 2월 21일 |
몰년/일 | 1626년 9월 30일 |
출신지 | 건주여진 |
관력 | 건주위(建州衛) 도독(都督), 용호장군(龍虎將軍), 버일러([貝勒], beile), 한(汗, han)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노아합적(奴兒哈赤)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실록』 22년 7월 12일, 『선조실록』 25년 7월 26일, 『선조실록』 25년 9월 17일, 『선조수정실록』 28년 12월 1일, 『선조실록』 29년 1월 30일, 『선조수정실록』 40년 2월 1일, 『광해군일기』 5년 2월 30일, 『광해군일기』 11년 3월 12일 |
청의 태조인 아이신 기오로 누르하치[aisin gioro nurhaci, 愛新覺羅 奴兒哈赤].
개설
누르하치는 청의 기초가 된 후금(後金)을 건국한 인물이었다. 25세에 기병하여 여러 여진 부락을 통합하였고, 명의 요동 일대를 평정하였다. 1616년에는 허투알라([赫圖阿喇], hetu ala(革圖阿拉=興京))를 수도로 삼고 후금을 건국하였으며, 천명(天命)이라 건원하였다. 1618년에는 칠대한(七大恨)을 명분으로 정명전(征明戰)에 나섰고 이듬해 사르후([薩爾滸], sarhū) 전투에서 명과 조선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이 전투 이후 누르하치는 요동 일대를 석권하였고, 심양(瀋陽, [盛京])으로 천도하였다. 1626년 누르하치는 대군을 이끌고 직접 영원성(寧遠城)을 공격하다가 실패하였고 이어 몽고(몽골) 차하르([察哈爾], cahar)를 공격하다가 7월에 죽었다. 심양의 복릉(福陵)에 안장되었고, 청이 건립된 이후에 태조고황제로 추존되었다.
가계
누르하치의 아버지는 현조선황제(顯祖宣皇帝)로 추존된 아이신 기오로 탁시([塔克世], taksi)이고, 생모는 선황후(宣皇后) 히타라([喜塔喇], hitara)씨였다. 동모 동생으로 호쇼이[和碩] 장친왕(莊親王)으로 추존되는 슈르가치([舒爾哈齊], šurgaci)와 도로이 통달군왕[多羅通達郡王]으로 추존되는 야르가치([雅爾哈齊], yargaci)가 있고, 이복동생으로 무르하치([穆爾哈齊], murhaci)와 바야라([巴雅喇], bayara) 등이 있었다.
누르하치는 적처인 원비(元妃) 퉁기야([佟佳], tunggiya)씨를 포함하여 모두 16명의 아내를 두었다. 이 가운데 황후로 추봉(追封)된 인물은 효자고황후(孝慈高皇后) 여허나라([葉赫那拉], yehe nara)씨 몽고저저([孟古哲哲], monggojeje) 와 효열무황후(孝烈武皇后) 울라나라([烏喇那拉], ula nara)씨 아바하이([阿巴亥], abahai)가 있었다.
누르하치는 16명의 부인으로부터 16명의 아들과 8명의 딸을 얻었고, 1명의 양녀(養女)를 포함하여 총 25명의 자녀를 두었다. 장자는 광략 버일러[廣略貝勒] 추연([褚英], cuyen)이었고, 차자는 예열친왕(禮烈親王) 다이샨([代善], daišan)과 친형제였다. 이들은 모두 적처인 원비 소생이었다. 그 밖에 푸챠([富察], fuca)씨 소생의 망굴타이([莽古爾泰], manggūltai)와 더걸러이([德格類], degelei), 울라 나라씨(효열무황후) 소생의 아지거([阿濟格], ajige), 도르곤([多爾袞], dorgon), 도도([多鐸], dodo) 등이 있고, 여허 나라씨(효자고황후)는 이후 태종(太宗)이 되는 홍타이지([皇太極], hongtaiji)를 낳았다.
활동 사항
누르하치는 1559년 2월 21일 허투알라에서 건주좌위(建州左衛)의 한 추장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6대조인 먼터무([猛特木, 猛哥帖木兒], mentemu)는 본래 원나라 오도리 만호부(斡朶里萬戶府)의 만호였는데 1405년에 명 조정에 입조하여 관직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가 죽은 뒤 아들 충샨(董山)이 그의 뒤를 이었다가 명조에 의하여 처형되는 등 갈등도 있었으나, 충샨의 아들 톨로([脫羅], tolo)가 명에 충순한 모습을 보이면서 원만한 관계를 맺었다. 누르하치의 4대조는 톨로의 동생인 시버오치 피양구([錫寶齊篇古], sibeoci fiyanggu)로서 그의 뒤를 아들 푸만([福滿], fuman)이 이었으며, 푸만의 넷째 아들이 누르하치의 조부인 기오창가([覺昌安], giocangga)이었다. 기오창가는 탁시 등의 아들을 두었는데, 누르하치는 탁시의 맏아들이었다.
누르하치는 열 살이 되던 무렵 생모인 히타라씨가 세상을 떠나면서 계모인 하다 나라([哈達那拉], hada nara)씨의 홀대를 받았고 19세가 되던 해에 분가하여 퍼알라에 정착하게 되었다. 탁시는 누르하치가 분가할 때 그에게 재산을 거의 분급해 주지 않았으므로 누르하치는 한동안 동생 슈르가치와 함께 인삼 등을 캐어 명나라의 무순(撫順) 지역의 호시(互市)에서 교역하면서 살아갔다. 이 시기에 누르하치는 몽골어를 익히고 기초적인 수준의 중국어도 익혔다고 전해지며,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나 『수호전(水滸傳)』을 읽으면서 지략을 쌓고 요동총병이성량(李成梁)과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1574년 건주우위(建州右衛)의 왕고(王杲)가 명조를 배반하자 이성량은 그를 주살하였는데, 이때 왕고의 아들인 아타이([阿台], atai)가 구러성[古勒城]으로 도피하였다. 아타이는 기오창가의 손녀사위였는데, 1583년 이성량이 구러성을 공격하자 기오창가 등은 향도로 종군하여 구러성에 들어가 손녀를 구하려다 아들 탁시와 함께 명군에 의하여 주살되었다.
누르하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하에 ‘13벌의 갑옷(遺甲十三副)’으로 기병하였다. 누르하치와 슈르가치 형제는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보상으로 이성량으로부터 받은 칙서 30통과 말 30필 등을 활용하여 점차 세력을 넓혀 갔고 1588년경에는 건주여진을 통일할 수 있었다(『선조실록』 22년 7월 12일). 이 시기에 누르하치는 스스로를 수러 버일러([淑勒貝勒], sure beile)라 부르기 시작하였는데, 명으로부터 도독(都督)에 제수되는 등 명과의 우호적인 관계도 유지하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건주여진을 통합한 뒤, 장백산 일대에 거주하는 여진 부족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여 1591년에는 압록강부를 복속시켰고 1593년에 해서여진이 주축이 된 몽고(몽골) 및 여진 각 부의 연합군을 격파한 뒤 1594년에는 장백산부 전체를 장악하여 세력을 크게 확대하였다. 이 시기에 명에서는 누르하치의 세력을 인정하여 그를 용호장군(龍虎將軍)에 임명하였다. 누르하치는 혼인 정책과 군사적 정복을 병용한 이른바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정책으로 인근 부락에 영향을 미치는 동시에 조선과 명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 시기 누르하치는 조선과 여러 차례 접촉을 시도하였다. 1592년 6월 누르하치는 영평부(永平府)에서 조선 사신 신점(申點)을 만나 월경 채삼 문제에 대한 문답을 제기하였다(『선조실록』 25년 7월 26일). 또 임진왜란 직후 건주여진의 조공 사절 마삼비(馬三非)는 자신이 누르하치를 설득하여 조선에 원병을 파견하도록 하겠다는 제안을 하기도 하였는데, 이 사실이 요동도사(遼東都司)를 통하여 조선에 전달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25년 9월 17일). 또 1595년 3월 누르하치는 평안도의 만포진(滿浦鎭)에 피로인(被擄人)을 송환해 주면서 서신을 보내 교섭 의사를 밝히기도 하였다. 같은 해 7월 평안도 위원(渭原) 일대에서 월경하여 인삼을 캐던 여진인 수십 명이 조선의 군민들에게 살해되는 일이 발생하자, 누르하치는 조선에 대한 보복을 계획하였다. 조선에서는 요동도사에 사태의 중재를 의뢰하는 한편, 조선군을 교련하기 위하여 입국해 있던 명의 유격(遊擊)호대수(胡大受)에게 부하 한 명을(1명을) 파견하여 건주여진을 설득해 줄 것을 청하기도 하였다(『선조수정실록』 28년 12월 1일). 조선에서도 신충일(申忠一)이라는 인물을 건주여진에 사절로 파견하여 교섭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29년 1월 30일). 임진왜란기 누르하치는 조선과의 변경 문제로 인하여 여러 차례 갈등을 겪었지만 무력 충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누르하치는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해서여진과 두만강 유역을 집중적으로 공략하였다. 우선 비교적 강대한 부족이었던 여허([葉赫], yehe)와 울라([烏喇], ula)에 대해서는 혼인과 혈맹을 통하여 화친하고, 상대적으로 약한 하다부와 호이파를 먼저 공략하였다. 1599년에는 맹세를 어겼다는 명분으로 하다부를 공격하였고, 1601년에는 완전히 병합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누르하치는 동해여진도 공략하여 많은 인구를 거두었다. 부양할 인구가 크게 증가하자 1603년에는 인근의 허투알라로 이주하였다. 1606년에는 몽골에서 누르하치를 쿤둘런한([神武皇帝], kundulen han)이라고 높여 불렀는데, 이는 누르하치가 처음으로 한[칸]이라는 호칭을 받은 것이었다.
누르하치는 1607년에는 동해여진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울라의 버일러 부잔타이([布占泰], bujantai)의 군대를 격파하였고, 이를 계기로 두만강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였다(『선조수정실록』 40년 2월 1일). 또 그해 해서여진의 또 다른 강대 부족인 호이파([輝發], hoifa)부를 병합하였다. 누르하치는 이때부터 울라부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여 1612년 9월에는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하였고, 그해 12월에는 재차 출병하여 이듬해 1월 마침내 울라를 멸망시키고 그 부족민들을 병합하였다(『광해군일기』 5년 2월 30일). 누르하치는 1598년 이후 지속적으로 두만강 동북쪽의 동해여진 부락들을 공략하였는데, 호이파와 울라를 멸망시킨 것을 계기로 이 지역에서의 경쟁자들을 모두 물리치게 되었다. 누르하치는 곧 여허로 도주한 부잔타이를 송환하라는 요청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허부를 공략하기 시작하였다.
누르하치의 여허 공략은 그의 세력 확장을 의식한 명의 견제로 인하여 난관에 봉착하였다. 명의 요동 아문에서는 여허에 1,000명의 화기수(火器手)를 보내 주둔하면서 누르하치를 견제하게 하였던 것이다. 명은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전통적인 전략을 고수하기 위하여 건주여진을 견제할 여허를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누르하치가 해서여진 4부 중 마지막으로 남은 여허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명과의 충돌이 불가피하였다.
1616년 1월 누르하치는 여러 신하들을 모은 자리에서 겅기연한([英明汗], genggiyen han)이라는 존칭을 받고 대금국([大金國=後金], amba aisin gurun)을 건국하고 연호를 천명(天命)이라 하였다. 그리고 2년 뒤인 1618년 4월에는 마침내 명에 대한 정벌을 공표하고 무순(撫順)을 함락하였으며, 그해 7월까지 요동 일대의 여러 성들을 함락하였다. 명에서는 건주여진에 대한 정벌을 결정하고 경략(經略)양호(楊鎬)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명군은 크게 4갈래로 나누어 진격하였으나 후금군에 의하여 하나하나 격파되어 실패하였다.
조선은 도원수강홍립(姜弘立)이 이끄는 13,000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명군 제독유정(劉綎)과 함께 진격하도록 했으나, 심하(深河) 일대에서 패하였고 도원수강홍립 이하 4천여 명의 군사들은 포로가 되었다(『광해군일기』 11년 3월 12일). 심하 전투(일명 사르후[sarhū, 薩爾滸]전투)에서 명군의 주력인 두송(杜松)의 부대가 가장 먼저 궤멸되었다.
누르하치는 심하 전투 이후 해서여진의 여허부를 멸망시키고, 1622년까지 요양(遼陽)·심양(瀋陽)·광녕(廣寧)을 점령하여 요하(遼河)의 서쪽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또 심양으로 도성을 옮겨 명에 대한 본격적인 군사 행동을 준비하였다. 1626년 여름 누르하치는 명의 영원성(寧遠城)을 공격하였다가 원숭환(袁崇煥)의 군대에 의하여 패전하였다. 누르하치는 그해 9월에 사망하였는데, 영원성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입은 부상 때문이었다는 설이 있으며 혹은 병으로 죽었다는 설도 있었다.
묘소
누르하치는 사후 효자고황후여허나라씨와 함께 심양의 복릉에 안장되었다. 복릉이라는 명칭은 숭덕 원년인 1636년에 태종홍타이지가 청을 건국하면서 정해졌다. 복릉은 심양의 소릉(昭陵), 신빈현(新賓縣)의 영릉(永陵)과 함께 ‘관외 삼릉(關外三陵)’ 혹은 ‘성경 삼릉(盛京三陵)’이라고 하였다. 이 능묘는 숭덕·순치·강희·건륭 연간에 수차례 개수되어 규모가 점차 확대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1929년에 복릉은 동릉공원(東陵公園)으로 개칭되었고, 1963년에는 요녕성(遼寧省)의 중점문물보호단위(重点文物保護單位)가 되었다. 2004년에 명청황가능침(明淸皇家陵寢)의 하나로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상훈 및 추모
1626년 7월 중순 누르하치는 병이 악화되어 청하(淸河)의 탕천(湯泉)에서 요양하였으나 8월 초 병세가 심각해지자 심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8월 11일 배에 오른 채 태자하(太子河)에서 병으로 죽었다. 향년 68세였다. 누르하치는 심양의 복릉에 안장되었고, 태조무황제(太祖武皇帝)라는 묘호를 받았다. 강희 연간에 ‘무(武)’를 ‘고(高)’로 고쳐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가 되었다.
참고문헌
- 『명신종실록(明神宗實錄)』
- 『명희종실록(明熹宗實錄)』
- 『만주실록(滿洲實錄)』
- 『명태조실록(淸太祖實錄)』
- 『삼조요사실록(三朝遼史實錄)』
- 『자암집(紫巖集)』
- 『만문노당(滿文老檔)』
- 閻崇年, 『努爾哈赤傳』, 北京出版社, 1983.
- 이블린 S. 로스키 저, 구범진 역, 『최후의 황제들』, 까치, 2010.
- 천제셴, 홍순도 역, 『누르하치: 청 제국의 건설자』, 돌베개,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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