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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14 기준 최신판




일본 실정시대 전기의 영주로, 구주탐제(九州探題)에 임명됨.

개설

원도진(源道鎭)의 본명은 삽천만뢰(澁川滿賴)로 원(源)은 본성(本姓)이고, 도진은 법명이다. 조선과의 통교 시에는 원도진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삽천만뢰는 1372년 삽천의행(澁川義行)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였지만 삽천씨의 가독이 되어 비중(備中)·안예(安藝)의 수호직을 역임하였다. 1396년 구주탐제(九州探題) 금천료준(今川了俊)이 파면된 후 새로이 구주탐제에 임명되었다. 구주탐제란 구주통치를 통괄하기 위한 실정막부의 기관이었다. 그러나 당시 구주는 막부에 대항하는 세력이 여전히 강해 이들과의 대결이 불가피하였다. 특히 구주탐제에 임명된 뒤 비전(肥前)의 수호도 겸임하고 축전(筑前) 박다(博多)에 거점을 두었기 때문에 이곳이 본거지였던 소이씨(小貳氏)와의 항쟁 관계는 만뢰대 이후까지도 계속되었다. 만뢰의 구주 통제력은 전대인 금천료준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삽천씨가 구주 북부에서 일정한 세력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여 존속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아울러 구주탐제는 만뢰 이후 삽천씨가 세습하는 것으로 되었다.

한편, 구주탐제가 된 이후 조선과의 통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만뢰와 조선과의 교섭은 30여 회에 이르며 만뢰의 일족·가신 등도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1419년 구주탐제를 아들인 의준(義俊)에게 물려주고 1424년 경도에 올라간 뒤 그 후에도 계속 경도에 체재하다가 1446년 사망하였다.

활동 사항

삽천만뢰는 구주탐제에 임명된 다음 해인 1397년 ‘구주탐제 원도진’의 명의로 조선에 사신을 파견해 예물을 바치고 대장경을 요청하였다(『태조실록』 6년 12월 29일). 이후에는 구주절도사(九州節度使)·구주목(九州牧) 등을 칭하기도 하였다.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는 이와 관련하여 “서장에는 구주부탐제(九州府探題)라 일컫기도 하고, 혹은 진서절도사(鎭西節度使), 혹은 구주백(九州伯), 구주도독(九州都督), 구주도원수 우무위(九州都元帥右武衛), 혹은 구주도독부탐제라 하였으며, 다만 우무위, 혹은 구주총관(九州摠管)이라고도 하여, 전후에 불리는 이름이 일정하지 않았으나 나라 사람들은 우무위전이라 일컬었다.”고 전하고 있다.

1419년 구주탐제를 아들에게 물려준 뒤에도 만뢰는 ‘전구주탐제’의 자격으로 아들 의준과는 별도로 계속 사신을 파견하였다(『세종실록』 2년 2월 25일). 만뢰는 1429년까지는 빈번히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후 약 10년 동안 사신의 파견이 없다가 1438년(세종 20) 다시 원도진 명의의 사신이 파견되었고 이것이 마지막이었다(『세종실록』 20년 6월 26일). 그런데 이와 관련해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는 1429년 이후에는 원도진으로부터의 사신이 없었다고 하고 있다. 사실 삽천씨는 1423년 소이씨에게 박다를 공격당해 크게 패한 뒤 이후 소이씨에게 밀려 쇠퇴 일로에 있었다. 그나마 소이씨에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대내씨(大內氏)의 원조 덕이었는데 1431년 대내성견(大内盛見)이 전사하자 더욱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1438년의 사신이 대마도의 종씨가 파견된 사신 등과 함께 왔던 점이나 점차 가짜 사신인 위사(僞使) 문제가 표면화되던 시기라는 점, 위사에 대마도나 박다의 상인들이 관여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1438년 사신의 경우는 위사였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은 왜구에 대한 대책의 일환으로 구주의 총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구주탐제와의 교섭을 중시하였고 만뢰 또한 조선에 피로인을 송환하는 등 조선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한편 일본의 여러 통교자들에 대하여 일정한 통제가 필요하였던 조선은 여러 방안을 강구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창구를 구주탐제로 일원화하는 것이었다. 즉, 1419년 조선은 일본의 통교자들이 만뢰의 서신을 받아와야만 응대하겠다는 방침을 전하였다. 그 이유는 조선이 구주탐제의 권한을 중시하였기 때문인데(『세종실록』 2년 7월 6일), 다른 측면에서 보면 구주탐제에 의한 왜인통제가 조선이 보기에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조선은 통교자의 신분 확인을 위해서 도서(圖書)를 지급하기도 하였는데 이를 지급받은 사람을 수도서인(受圖書人)이라고 한다. 만뢰의 사신이 조선에 파견되어 왔을 때는 종종 만뢰의 친족이나 배하 가신들의 사신이 동행하였던 경우가 많다. 빈번히 등장하는 원창청(源昌淸, 본명 길견창청(吉見昌淸))·평종수(平宗壽, 본명 판창종수(板倉宗壽))·평만경(平滿景, 본명 판창만경(板倉滿景)) 등과 만뢰의 조카인 원만직(源滿直, 본명 삽천만직(渋川滿直)으로 1428년 구주탐제가 됨)이 파견한 사신은 실질적으로 만뢰의 사신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는데, 만뢰와는 별도로 이들도 조선으로부터 도서를 받고 수도서인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중 박다의 상인인 종금(宗金)은 1425년 도서를 받았는데(『세종실록』 7년 10월 18일), 그는 개별적으로 조선과 통교하는 한편 일본국왕이나 삽천씨 등의 사신을 대행하기도 하였다.

참고로 1424년 조선은 통교자의 관리를 위하여 구주탐제 원의준에게 매년 봄과 가을에 한 번씩 정기적인 교역선을 보내도록 하였는데(『세종실록』 6년 12월 17일) 이것이 세견선(歲遣船)의 시초가 되었다.

참고문헌

  • 関 周一, 『中世日朝海域史の硏究』, 吉川弘文館, 2002.
  • 橋本 雄, 『中世日本の國際關係―東アジア通交圏と僞使問題』, 吉川弘文館, 2005.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
  • 須田牧子, 『中世日朝關係と大內氏』, 東京大學出版會, 2011.
  • 川添昭二, 「九州探題と日鮮交涉」, 『對外關係の史的展開』, 1996.
  • 川添昭二, 『九州の中世世界』, 海鳥社, 1994.
  • 荒木和憲, 『中世對馬宗氏領國と朝鮮』, 山川歷史モノグラフ, 山川出版社,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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