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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13 기준 최신판




일본 안토·도산(安土·桃山)시대 및 강호(江戶)시대 전기의 영주.

개설

풍신수길(豊臣秀吉)의 군사(軍師)로 잘 알려진 흑전효고(黑田孝高)의 아들로 아명은 송수환(松壽丸), 성장해서는 길병위(吉兵衛)라고 불렀다. 갑비수(甲斐守)를 칭하다가 1600년 관원[關ヶ原] 전투에서 공적을 인정받아 축전(筑前)을 영지로 받은 이후 축전수(筑前守)로 고쳤다.

내용 및 특징

1577년 장정이 10세였을 때 부친 효고가 직전신장(織田信長)에게 복속했던 때문에 신장에게 인질로 보내졌다. 장정은 당시 근강(近江) 장병성(長浜城) 성주였던 풍신수길에게 맡겨져 그 아래서 소년기를 보냈다. 1582년 수길을 따라 출진한 이후 여러 전장에 참여했다. 1583년 전공으로 450석의 영지를 받았고 그 이듬해에는 2,000석이 더해졌다. 1587년 구주 정벌의 공으로 영지를 풍전(豊前)으로 옮겼는데, 1589년 부친 효고로부터 가독을 물려받아 풍전 중진(中津)을 중심으로 12만 석의 영주가 되고 갑비수(甲斐守)로 서임되었다.

1592년 시작된 임진왜란 시에는 3번대의 주장으로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에 건너와 1번대 소서행장, 2번대 가등청정(加藤淸正)과는 다른 진로로 북진했다. 5월 한양에 입성 후에는 황해도 공략을 담당했다. 정유재란 때도 5,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가등청정(加藤淸正) 등과 함께 주로 우군에 속해 싸웠다. 그러나 왜란 기간 중 석전삼성(石田三成) 등 문치파(文治派)와 갈등이 심해졌다. 수길이 사망한 이후 덕천가강(德川家康)에 접근해 이혼 뒤 가강의 양녀와 재혼했다. 1600년 관원 전투에서는 덕천가강이 이끄는 동군에 속해 석전삼성이 이끄는 서군과 맞서 싸웠다. 이 싸움의 승패를 가른 결정적 요인이 되었던 것은 서군에 속했던 소조천수추(小早川秀秋)가 한창 전투가 진행 중이었을 때 돌연 태도를 바꾸고 서군을 공격했던 것인데, 수추가 내응하도록 공작에 나섰던 것이 장정이었다. 이런 공적을 인정받아 축전 52만 3000여 석, 실제로는 100만 석에 해당한다는 영지를 받고 복강성(福岡城)을 축조해 거성으로 삼았다. 1603년 조정으로부터 종사위하 축전수(筑前守)에 서임되었다. 1623년 강호막부(江戶幕府) 2대 장군 덕천수충(德川秀忠)의 상경에 앞서 먼저 경도(京都)로 갔으나 8월 보은사(報恩寺)에서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활동 사항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흑전장정(黑田長正)’이라고 기록된 것은 1번뿐이고[『선조실록』 28년 4월 19일 번째기사] 그 이외에는 ‘장정(長政)’이라고 제대로 표기되어 있다. 1595년(선조 28) 4월의 기사는 항왜(降倭)의 공초문에 의한 것으로 1596년 이후의 기사에서 성을 생략한 채 ‘장정(長政)’이라고만 표기되는 경우와 비교하면 1595년까지만 하더라도 왜군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 장정의 이름도 잘못 기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선조실록』에는 ‘장정’이라는 본명보다 통칭이었던 ‘갑비수(甲斐守)’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제일 처음 장정과 관련된 기사는 개전 초인 1592년(선조 25) 11월, 전황 보고의 내용 가운데 왜군 장수의 이름과 배비 상태에 대한 정보가 있는데 여기에서는 ‘흑전갑비수(黑田甲斐守)’라고 되어 있다(『선조실록』 25년 11월 11일). 1596년(선조 29) 화의협의를 위해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황신(黃愼)이 일본에서 본 서계에도 ‘흑전갑비수’로 되어 있었고(『선조실록』 29년 12월 29일) 정유재란 시의 병력 배치 관련 정보에서는 ‘흑전갑비수를 장정이라고 한다(黑田甲斐守所謂長政)’라고 되어 있다(『선조실록』 30년 10월 3일). 한편, 갑비수의 일본어 음을 한자 발음에 맞춰 가인로가미(可仁老加未)라고 나타낸 부분도 있다(『선조실록』 23년 2월 10일).

1592년 장정은 이정암(李廷馣)이 지키던 연안성(延安城)을 공격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적은 병력으로 적을 물리친 이정암의 승전 소식은 『선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데, 상대 왜군 장수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선조실록』 25년 9월 19일). 그런데, 『선조수정실록』은 연안성 싸움에 대해 더욱 자세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장정(長政)’(『선조수정실록』 25년 7월 1일), ‘갑비풍신장정(甲斐豐臣長政)’(『선조수정실록』 25년 9월 1일)이라고 적장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 외에도 장정은 행주산성이나 제2차 진주성 전투 등 임진왜란 시의 주요 전투에 참여했고 정유재란 시에도 황석산성 전투·직산 전투 등에 임했다. 전쟁 후반기에 왜군은 한반도 남부의 실질적 지배와 지구전을 위한 거점으로 삼기 위해 여수에서 울산에 이르는 지역에 왜성(倭城)을 축조했다. 장정은 주로 경상도 일원에 왜성을 축조하고 양산성(梁山城) 일명 물금증산성(勿禁甑山城)에 주둔했다(『선조실록』 31년 9월 28일).

1600년 관원 전투의 비교적 소상한 내용이 『선조실록』에 있는데, 여기에서도 ‘갑비수’ 장정의 활동상을 전하고 있다(『선조실록』 34년 4월 25일). 그 뒤 1606년 12월의 기사에는 장정의 신분 변동이 반영되어 ‘축전수장정(筑前守長政)’이라고 되어 있다(『선조실록』 39년 12월 11일).

참고문헌

  • 한일관계사연구논집 편찬위원회, 『임진왜란과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2005.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
  • 北島万次, 『豊臣秀吉の朝鮮侵略』(日本歷史叢書), 吉川弘文館, 1995.
  • 戰國人名辭典編集委員會, 『戰國人名辭典』, 吉川弘文館, 2005.
  • 中野 等, 『文祿·慶長の役』(戰爭の日本史16), 吉川弘文館,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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