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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제대에 한림원 내각학사를 지낸 청의 관료.

개설

숭귀는 몽골인으로 성은 석(石)씨이며 자가 무당(撫棠) 혹은 양경(良卿), 호는 보산(補山)이다. 몽골 정백기(正白旗)인이다. 1761년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주로 한림원(翰林院)의 관직인 시강(侍講)·시독(侍讀) 등을 지내다가 1773∼1783년에는 한림원의 내각(內閣) 학사(學士)가 되어 예부(禮部) 시랑(侍郞)의 직함을 겸하였다. 그사이에 무영전총재관(武英殿總裁官), 경연(經筵) 강관(講官), 몽골 양람기(鑲藍旗) 부도통(副都統)을 지냈다. 1776년에는 청의 산질대신(散秩大臣)기오로 완푸([覺羅萬福], gioro wanfu)와 함께 조선에 칙사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활동 사항

숭귀는 1761년 진사가 된 이후 주로 한림원의 관원으로 활동하였다. 1767년에는 소첨사(少詹事)로서 하남성의 학정(學政)을 관리 감독하는 임무를 수행하였고, 1773년에는 한림원의 내각 학사로 임명되었다. 1774년에는 무영전총재관을 지냈고, 1775년에는 내각 학사로서 몽골 양남기 부도통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전시독권관(殿試讀卷官)을 지냈으며, 이듬해에는 경연 강관이 되었다.

1776년 조선 조정에서 영조의 죽음을 알리고, 정조의 즉위와 사도세자의 시호 등을 주청하자, 건륭제는 산질대신기오로 완푸와 내각 학사숭귀를 각각 정사(正使)·부사(副使)로 삼고 영조에게는 장순(莊順), 사도세자에게는 각민(恪愍)이라는 시호를 내렸다(『정조실록』 즉위년 8월 18일). 이해 9월 4일 패문(牌文)이 먼저 발송되어 24일에 경성(京城)으로 들어왔고, 숭귀는 상사(上使)기오로 완푸, 5명의 통관 등으로 구성된 칙사 일행과 함께 9월 11일에 회동관(會同館)에서 출발하여 10월 12일에 압록강을 건넜고, 같은 달 27일에 경성으로 들어왔다. 그는 “경연강관 무영전총재 내각학사(經筵講官武英殿總裁內閣學士) 겸 예부 시랑 서양람기 몽고(몽골)부도통 가일급(兼禮部侍郞署鑲藍旗蒙古副都統加一級)”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보왕칙서(封王勅書), 진종대왕(眞宗大王)과 그 왕비의 추숭 고명 한 통씩(1통씩), 영조에 대한 제문과 금천(金川)을 토평했다는 조서와 황태후에게 존호를 올렸다는 조서 등을 가지고 왔다. 영조는 모화관(慕華館)에서 숭귀와 기오로 완푸 등을 맞이하였고, 조문과 조제를 행한 뒤에 접견하여 다례를 행하였다. 칙사 기오로 완푸 일행은 11월 2일에 경성을 떠나 18일에 압록강을 건너 돌아갔다(『정조실록』 즉위년 10월 27일). 숭귀는 이 사행 때, 평양부(平壤府)의 사인암(舍人巖)에 시를 새겨 넣었다고 한다(『정조실록』 8년 12월 16일).

1778년 3월의 회시(會試)에서는 이부(吏部) 우시랑(右侍郎)왕걸(王杰)과 함께 부고관(副考官)을 지냈으며, 1780년 8월의 천순(順天) 향시(鄕試)에서는 형부(刑部) 좌시랑(左侍郞)두옥림(杜玉林)과 부고관으로 활동했다. 숭귀는 1783년 3월 어문 판사(御門辦事)와 관련하여 올린 독본(讀本)에 문제가 많다는 지적을 받았다. 건륭제는 숭귀를 혁직하도록 하고 건청문(乾淸門)의 어전시위(御前侍衛)로 파견하여 속죄하게 하였다. 숭귀는 2년 뒤인 1785년 2월에 시강학사(侍講學士)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경국(司經局) 세마(洗馬)에 임명되었고, 1786년 10월에는 첨사(詹事)로 기용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동문휘고(同文彙考)』
  • 『청사고(淸史稿)』
  • 『청고종실록(淸高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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