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덕수(杜德綏)"의 두 판 사이의 차이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XML 가져오기)
 
(차이 없음)

2017년 12월 22일 (금) 01:13 기준 최신판




신미양요 당시 미국의 문안총판(文案總辦)의 직함으로 조선 측과의 통역을 담당한 인물.

개설

두덕수는 드류(Edward B. Drew)의 한자식 표기이다. 드류는 1863년 미국 하버드(Harvard)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864년에는 하버드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이듬해인 1865년부터 1908년까지 중국 해관에서 일을 하였는데, 1868년부터 세무사로 임명되었다. 한편 그는 1871년 신미양요 당시 미국 측 통역으로 복무하기도 하였다. 세무사로 일하는 동안, 그는 중국인의 일상과 중국에서 그와 그의 가족의 생애를 담은 사진을 촬영하고 수집하였는데, 그가 모은 사진에는 중국의 관습, 공공행사 및 각종 의례 등이 잘 나타나 있었다. 현재 드류가 촬영 및 수집한 사진, 그리고 문서들은 하버드대학교 옌칭(Yenching)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활동 사항

1871년 미국 정부는 제너럴셔먼(General Sherman)호 사건의 책임을 묻고, 동시에 조선에 통상조약 체결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주청 미국공사 프레드릭 로우(Low, Frederick Ferdinand)에게 아시아 함대의 조선 출동을 명령하였다. 로우는 미국의 아시아 분함대 사령관 로저스(John Rodgers) 소장에게 군함 5척과 병력 1,500여 명을 이끌고 조선으로 침략하도록 조치를 취하였는데, 중국 해관에서 세무사로 일하고 있던 드류는 중국어와 한문 통역을 담당하는 문안총판의 직함을 부여받고 함대에 합류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진무사정기원을 통해서 광성진과 손돌목에서 포격을 한 미군에 서신을 보내어서 조선 병력이 미국 함대에 포격한 사실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조선 정부는 미국과 수호 통상을 할 생각이 없음을 통보하였다. 이에 드류는 조선 정부의 조속한 협상 참여를 종용하는 답신을 보내는 한편(『고종실록』 8년 4월 17일), 조선 측에서 보낸 관리의 직함이 낮다는 이유로 교섭을 거절하기도 하였다(『고종실록』 8년 5월 17일). 드류는 부평부사, 강화유수와 서신을 통한 교섭을 담당하였는데, 조선 측에서 미국 함대의 포격 행위를 항의하자, 드류는 조선 정부가 국서를 접수하지 않는 점을 비난하고 교섭 사절을 조속히 파견할 것을 요구하였다.

6월 10일 미군이 초지진에 상륙하고, 이튿날 광성보를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이후 드류는 조선 관리에게 미군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조선군 포로를 석방하겠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드류는 조선 정부가 미국 정부의 국서를 접수하지 않는 점을 재차 항의하였으며, 교전의 책임을 두고 부평부사와 논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로저스 제독은 강화도초지진과 광성보에서 철수를 결정함에 따라, 드류는 조선 측과 더 이상 협상을 진행하지 않고 청국으로 귀환하였다. 이후 드류는 중국 해관의 세무사로 근무하면서, 조선(대한제국)과 큰 연관을 맺지 않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저술 및 작품

Sir Robert Hart and His Life Work in China, The Journal of Race Development, Volume 4, July 1, 1913.

참고문헌

  • 『동문휘고(同文彙考)』
  • 김원모, 『근대 한미교섭사』, 홍성사, 1979.
  • 근대한국외교문서편찬위원회, 『근대한국외교문서』 2, 동북아역사재단, 2009.7 ,
  • 김원모, 「미국의 조선원정과 제1차 조·미전쟁」, 『동양학』 8, 1978.
  • 중앙연구원 근대사연구소 편, 『청계중일한관계사료(淸季中日韓關係史料)』, 중앙연구원 근대사연구소, 1972.
  •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866~1882. NARA I & II: National Archive Records Administration Micro Fil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