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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13 기준 최신판




명나라 말기 명과 조선, 후금 사이에서 활동했던 명의 장수.

개설

모문룡은 명나라의 장군으로 명나라 말기에 요동에 머물며 후금의 진강(鎭江: 현 단동시 구련성)을 공격하는 등 후금의 배후를 공격하여 공을 세웠다. 관직이 총병관(總兵官), 좌도독(左都督)까지 올랐다. 명·청 교체기에 조선의 가도(椵島)에 머물면서 조선, 명, 후금(청) 사이에서 활동했다. 1629년 원숭환(袁崇煥)이 교만과 횡포 그리고 후금과 내통한다는 죄목으로 그를 처형하였다.

가계

활동 사항

모문룡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모친을 따라 외삼촌인 심광조(沈光祚)에 의탁하여 살았다. 젊은 시절부터 기병과 궁수로서 명성을 떨쳤다. 심광조가 모문룡을 요동총병이성량(李成梁)에게 추천하여 천총(千總)이 되었다. 후에 요동순무왕화정(王化貞)이 무재(武才)를 보고 받아들여 모문룡은 유격(遊擊)이 되었다. 왕화정이 요동순무로 있던 기간에 명은 요동의 70여 개 성보를 후금에게 서서히 빼앗겨 점령당하고 있었고, 또한 심양(瀋陽)과 요양(遼陽)도 잇달아 빼앗겨 왕화정은 요서 지방의 광녕(廣寧)에 머무르며 수비하고 있었다. 왕화정은 요동 한인의 후금에 대한 불만을 이용하여 모문룡을 파견해 요동에서 유민을 모으게 했으며 후금에 반항하는 조직적인 활동을 하고자 하였다.

1621년 명은 후금에게 점령된 진강성을 공략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진강은 압록강 변에 붙어 있는 성으로 이 시기 성을 지키는 유격은 동양진(佟養眞)이었다. 동양진은 동양정(佟養正), 혹은 동양성(佟養性)이라고도 불리는데, 청 태종황태극을 도와 홍이포를 제조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모문룡은 마침내 진강을 회복하여 진강의 군사 400여 명이 투항하는 등 압록강 변 탕참(湯站) 일대의 성보를 잇달아 명나라 수중으로 만들었다. 조정은 그의 공을 인정하여 상으로 은 200냥을 내렸다. 이후 모문룡은 조정에 병사와 군량 지원을 계속 요청하였으나,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문룡은 결국 다시 후금군에게 진강성이 함락되기 전에 조선의 가도로 들어가 재기를 도모하였다. 이후 요동 사람들 상당수는 다시 가도로 들어가 가도는 번화한 도회지처럼 되었다. 가도를 피도(皮島)·직도(㮨島)라고 불렀는데, 이때 모문룡이 운종도(雲從島)로 이름을 고쳐 자기 이름의 ‘용’이 구름 속에서 나온다[雲從]는 뜻에 맞게 하였다(『광해군일기』 14년 11월 11일).

후금은 진강을 점령한 후 조선 경내로 진입하는 등 모문룡을 찾아내고자 하였다. 조선은 명조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모문룡을 몰래 보호하고자 하였고, 후금은 모문룡의 행방을 탐문하고자 하였다. 후금은 봉황성 태수에게 명하여 모문룡이 어느 섬에 있는지 아니면 조선의 어떤 성에 있는지 밀탐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곧 후금은 모문룡, 진양책(陳良策) 등이 조선의 용천(龍川)에 거주한다는 사실을 탐지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누르하치는 조선에 서신을 보내 모문룡을 체포하여 송환해줄 것을 요구하였고 요구에 불응할 경우 조선을 토벌하겠다고 협박하였다.

모문룡은 후금의 추적으로부터 벗어나며 군대를 조직하는 데 착수하고 요동의 근거지를 수복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는 가도 등 주변의 섬에 울타리를 설치하여 멀리 한인과 요동 사람, 상인 등 많은 사람을 흡수하고자 하였다.

가도 북부는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입구와 가까웠다. 섬의 동서 길이는 15리(약 5.9㎞)이며 남북의 넓이는 10리(약 4㎞)이다. 조선인이 직접 본 것에 근거하면 섬 안의 형세는 동, 서, 남 3면이 에워싸여 있으며 1면만이 열려 있었다. 북쪽으로 하나의 봉우리가 있으며 골짜기 중의 산꼭대기에서 대략 3,000여 호가 있었다. 섬 안에 산이 있어 가파른 절벽이 많았으며 4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지키기는 쉽고 공격해 들어가기는 어려웠다. 요동 연해 도서와 가까워서 해운(海運)을 이용하여 연락하기가 대단히 편리하여 군사가 서로 성원하였으며 방향을 바꾸어 운송할 수 있었고, 후금의 위협을 받지 않았다. 모문룡은 그의 총병관부를 이 섬에 설치하여 동강진(東江鎭)이라 불렀다. 모문룡이 주둔한 이후에 가도의 황야는 그 모습이 신속하게 바뀌어 요민으로 투항하여 온 사람들이 증가하였고 요동을 회복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그는 요동 회복을 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요동으로 진출하기 쉬운 여러 섬에 병력이 배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산동반도 북부 바다 중 묘도(廟島), 황성도(皇城島) 등 외에 삼산도(三山島), 삼산도의 동쪽 200리(78.5㎞)에 위치한 광록도(廣鹿島), 광록도의 동쪽 50여 리(19.6㎞) 장산도(長山島), 장산도의 동쪽 200여 리에 위치한 석성도(石城島), 소송도(小松島), 녹도(鹿島), 그리고 내지의 애양(靉陽) 관전(寬甸) 등에 군사를 배치해 연해의 도시를 공략하여 점차 요동성으로 진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문룡의 계획은 여순으로부터 요동반도 동남 연해의 각 섬을 방어선으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명 조정은 모문룡의 이러한 계책에 대해 논의하였으나 병부에서는 모문룡이 누르하치를 소멸시키기에는 역량이 부족하며 견제하는 역할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명 조정은 원칙적으로 모문룡의 배치에 동의했음에도 병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 산해관을 중시하고 연해를 소홀히 여기는 결과가 되어버렸다.

1624년 5월 모문룡은 후금의 동부 휘발(輝發) 지역으로 진공하기도 하였고, 같은 해 8월에는 의주성의 서쪽에서 강을 건너서 섬으로 들어와 둔전(屯田)의 개간을 시도하기도 하였다(『인조실록』6년 1월 4일). 그러나 이러한 모문룡의 시도는 매번 후금의 공격을 받았고 수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또한 1625년 모문룡은 병사 300명을 파견하여 야밤에 요주성(耀州城) 남쪽 둔채로 들어섰으나 후금총병양길리(楊吉利)가 이끄는 병사에게 발각되었다. 1626년 5월에는 내지 깊숙이 들어가 안산(鞍山)을 습격하였으나 후금의 파포태(巴布泰)에게 격퇴당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사르후([薩爾滸], Sarhu) 성을 습격하는 등 후금을 교란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모문룡의 군대는 소수였으며 후금과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기에는 수적 열세에 처해 있었다.

1627년 후금은 조선이 모문룡을 몰래 원조한다는 이유로 조선으로 출병하여 정묘호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처럼 모문룡은 후금과 조선 사이에서 중요한 외교적 사안이 되었다. 모문룡은 조선에 모량(毛粮) 혹은 서량(西粮), 당량(唐粮)으로도 불리는 군량 지원 등의 어려운 요구를 하기도 했으며(『인조실록』2년 11월 28일)(『인조실록』4년 10월 14일)(『인조실록』6년 9월 24일), 군사를 풀어놓아 횡포를 부리고 소와 말을 약탈하는 등 여러 폐단을 일으켰다(『인조실록』2년 6월 8일)(『인조실록』4년 11월 2일).

하지만 결국 그는 명의 적극적인 경제적·군사적 지원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명나라가 차지했던 요양과 심양 등 요동의 땅을 회복하는 데는 성공할 수 없었다. 1629년에 모문룡은 새로 지휘관으로 임명된 원숭환과 갈등을 빚게 되었고, 당시 황제로부터 요동 지휘의 전권을 위임받은 원숭환은 모문룡을 체포하여 오만함과 명령 불복종의 죄로 참하였다(『인조실록』7년 6월 30일).

참고문헌

  • 孫文良, 『明淸戰爭史略』, 遼寧人民出版社, 1986.
  • 閻崇年, 『明亡興淸六十年』, 中華書局,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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