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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에 참전했던 명나라 무장.

개설

계금의 자는 장경(長庚)이다. 절강성 연해 송문진(松門鎮) 사람으로 1568년 무과 진사에 합격하였다. 만력 연간 총병(總兵)을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에 참가하여 1598년(명 만력 26) 노량해전에 참전하였으나 같은 해 전사하였다. 계금 사후 명 조정은 그를 1급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책훈하였고 1643년(명 숭정 16)에는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내렸다. 충청남도 보령에는 그의 공덕비가 지금까지 전한다.

가계

계금은 송문위(松門衛)의 무장 세가 출신이다. 선조부터 송문위에서 지휘(指揮)를 지냈으며 그의 아버지 계당(季堂) 역시 송문위 지휘를 지내는 등 대대로 무직(武職)을 지냈다.

활동 사항

계금은 1568년(명 융경 2) 무과진사(武科進士)에 합격하였다. 무과진사에 합격한 후 절강(浙江) 해염(海鹽)에서 비왜장군(備倭將軍)을 지내다가 뒤에 광동(廣東) 조주(潮州)의 참장(參將)을 지냈고 다시 도적 토벌의 공으로 총병(總兵)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조정의 윤허를 받아 집으로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다가 다시 기용되어 산동(山東) 임청(臨清) 참장을 지냈고 뒤에 진강부(鎮江) 부총병(副總兵)으로 승진하였다.

정유재란에 3천여의 수군을 거느리고 유격(遊擊)으로서 참전하여 남원을 거쳐 보령으로 진군하였다. 처음 예교성(曳橋城)의 소서행장(小西行長)을 수륙으로 공격할 때에 팔에 탄환을 입는 부상을 입었다(『선조실록』 31년 10월 1일). 나중에 진린(陳璘) 휘하의 수군으로 활동하였는데 이순신이 벤 왜구의 수급을 가로채는 등의 일로 보고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31년 10월 4일). 1598년(선조 31) 노량해전에서는 병사를 독려하는 등 상당히 활약하였다.

저술 및 작품

시에 능하였다. 그의 작품 「우인초유위우동작(友人招遊委羽洞作)」이 『위우산지(委羽山志)』에 전한다.

묘소

계금의 묘는 송문진(松門鎮) 송남촌(松南村)호갱산(虎坑山) 위에 위치한다.

상훈 및 추모

대한민국 충청도 보령시 해변에 계금의 공덕비가 있다.

참고문헌

  • 『난중일기(亂中日記)』
  •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
  • 『명사(明史)』
  • 『태평현지(太平縣志)』
  • 이민웅, 「조·명 연합함대의 형성과 노량해전 경과」, 『역사학보』178, 역사학회,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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