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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완조(阮朝)를 건국한 인물.

개설

1774년 베트남 남부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광남국(廣南國)은 완문혜(阮文惠)의 서산(西山) 세력에게 멸망하였다. 1792년 서산왕조(西山王朝)의 완문혜가 죽자, 광남국의 잔존 세력인 완복영은 시암 및 프랑스 세력의 도움을 얻어 1802년 서산왕조를 무너뜨리고 완조(阮朝)를 세웠다. 이후 청으로부터 책봉과 남월(南越) 국호를 얻고, 독자적인 국가의 체계를 갖추었다.

활동 사항

18세기의 베트남은 유명무실한 려(黎)왕조 대신 북부의 진씨(鄭氏), 남부의 완씨(阮氏)가 지배하고 있었다. 1771년 발생한 서산운동이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1774년 완씨의 광남국(廣南國)이 멸망하고 완씨 일족이 거의 학살되었다. 이때 살아남은 완복영은 시암(태국)의 짜끄리왕조, 프랑스 선교사 등의 도움을 받아 서산왕조에 대항하였다. 결국 1801년 6월에 복춘(福春: 현 후에), 1802년 7월에는 승룡(昇龍: 현 하노이)을 탈환하고 서산왕조를 멸망시켰다.

완복영은 1802년 6월, 승룡으로의 북진에 앞서 복춘에서 제위에 오르고 연호를 가륭(嘉隆)으로 정하였다. 황제가 된 완복영은 완광정(阮光定)을 청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자신을 책봉해 줄 것, 남월을 국호로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청조는 광서순무(廣西巡撫)였던 손옥정(孫玉庭)의 건의를 받아들여 월남(越南)이라는 국호를 내려 주었다. 완복영은 이를 받아들이고 1804년 1월 승룡에서 월남 왕의 자리에 올랐다. 1803년 조선의 연행사 일행은 귀국 후 올린 별단을 통하여, 당시 완복영이 서산왕조를 물리치고 청나라에게 책봉을 받은 사실을 보고하였다(『순조실록』 3년 11월 15일).

베트남 지역을 통일한 이후 월남은 새로운 행정·군사·관료제도를 실시하고 법전을 반포하였다. 세로 형태로 길게 뻗은 영토를 북기(北圻)·중기(中圻)·남기(南圻)와 북성(北城)·근기(近畿)·가정성(嘉定城) 등의 명칭으로 나누어 북부·중부·남부를 편제하였다. 그리고 청나라의 『대청률(大清律)』을 참조하여, 1815년 『가륭률서(嘉隆律書)』를 반포하였다. 또한 청나라에 조공을 바쳤음에도 주변의 여러 나라에 대해서는 스스로를 황제라고 칭하였고, 독자 연호를 사용하였다. 1812년에는 청에 알리지 않고 국호를 대월(大越)로 바꾸기도 하여 종속을 벗어나는 독자적인 의식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완복영은 18년의 재위 후 1820년 5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묘소

묘소는 천수릉(天授陵)이다. 천수릉은 1814년 가륭황제의 첫 번째 황후인 승천고황후 송씨란(承天高皇后 宋氏蘭)을 위하여 만들었으나 가륭제 역시 사후 이곳에 묻혔다. 위치는 복춘 남쪽 20㎞ 지점의 향차(香茶: 현 흐엉짜)이다.

참고문헌

  • 송정남, 『베트남의 역사』, 부산대학교 출판부 , 2000.
  • 유인선,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이산, 2002.
  • 노대환, 「18세기 후반~19세기 조선 지식인의 베트남 인식」, 『조선시대사학보』 58, 2011.
  • 유장근, 「18세기 말 월중관계의 일연구: 서산당사건을 중심으로」, 『慶大史論』 창간호,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