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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12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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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대발 |
한글표제 | 대발 |
한자표제 | 戴拔 |
대역어 | 에른스트 오페르트(Enst Jakob Oppert) |
관련어 | 남연군(南延君), 오페르트 도굴사건[南延君墳墓盜掘事件],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금단의 나라 조선 기행』 |
분야 | 정치/외교/외교사안 |
유형 | 인물 |
지역 | 독일/중국/대한민국 |
시대 | 청/조선 |
왕대 | 청/조선 |
집필자 | 한승훈 |
성별 | 남자 |
생년/일 | 1832년 12월 5일 |
몰년/일 | 1903년 9월 19일 |
출신지 | 독일 함부르크 |
가족관계(부,조,외조[모], 장인[처], 형제) | 형제: 율리우스 오페르트(Julius Oppert), 구스타프 오페르트(Gustav Solomon Oppert)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대발(戴拔)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고종실록』 3년 2월 18일, 『고종실록』 3년 7월 13일, 『고종실록』 3년 11월 5일, 『고종실록』 5년 4월 21일, 『고종실록』 5년 4월 23일 |
독일연방과 독일제국의 상인이자 항해가로, 1868년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인물.
개설
대발은 오페르트(Enst Jakob Oppert)의 한자식 표기이다. 오페르트는 1866년 2월에 충청도 근해와 강화도로 가서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였다가 거절당하였다. 1868년에는 충청도 아산만 덕산군에 상륙해서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다가 실패하였다.
가계
오페르트는 함부르크의 부유한 유태인 은행가 집안 출신이었다. 오페르트의 형제 중 한 명인 율리우스 오페르트(Julius Oppert)는 아시리아학자(Assyriologist)가 되었으며, 또 다른 형제 구스타프 오페르트(Gustav Solomon Oppert)는 인도학자(Indologist)이자 산스크리트학자(Sanskritist)가 되었다.
활동 사항
1861년부터 오페르트는 홍콩·상해·일본에서 무역업에 종사하였는데, 조선에 대한 관심을 갖고 세 차례에 걸쳐서 조선을 항해하였다. 첫 번째는 1866년 2월로 영국인 모리슨([馬力勝], James Morrison)과 함께 영국 상선 로나([羅那], Rona)호에 동승하여서 충청도 평신진(平薪鎭)의 조도(鳥島: 현 충청남도 서산군 대산면 영탑리) 앞바다(『고종실록』 3년 2월 18일), 충청도 해미현(海美縣) 조금진(調琴津)에 정박하여서 조선 관리에게 통상을 요구하였다.
두 번째는 1866년 7월로 오페르트는 엠퍼러(Emperor)호를 마련해서 상해에서 출발하여 흑산도·아산만, 덕적도를 거쳐서 강화도를 탐사하였다. 이때, 그는 월곶진(月串津)에 정박하여서 조선 관리에게 통상을 요구하였다(『고종실록』 3년 7월 13일). 조선 정부는 오페르트가 영국 상선에 탑승하였다는 이유로 영국 상인 내지는 선주로 오인하기도 하였다. 조선 정부는 청 예부에 보낸 자문에서 국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통상 수교 요청을 거부하였다고 밝히기도 하였다(『고종실록』 3년 11월 5일).
세 번째 항해는 1868년 6월로 오페르트는 1,000톤급 기선 차이나(China)호, 그레타호(Greta)호를 이끌고 충청도 덕산군 구만포에 상륙하였다. 그곳에서 오페르트는 러시아 사람이라고 지칭하면서 관청을 습격해서 무기를 탈취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조선 관군 및 백성과 무력 충돌이 있었다. 우세한 화력으로 조선인을 제압한 오페르트 일당은 밤에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로 가서 도굴을 감행하였는데, 묘지 구덩이가 견고한 돌로 덮여 있는 관계로 도굴에 실패하였다(『고종실록』 5년 4월 21일). 오페르트가 남연군묘를 도굴할 당시 일행으로 병인사옥 당시 조선을 탈출하여서 병인양요 때 프랑스로즈(Pierre-Gustave Roze) 제독이 이끄는 조선 원정대의 길 안내 역할을 하였던 스타니스라스 페롱(Stanislas Féron) 신부, 미국인 젠킨스(Frederick Henry Barry Jenkins), 그리고 조선인 천주교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남연군 묘 도굴사건으로 젠킨스는 미국인에게 고발을 당하였으며, 페롱 신부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소환을 당하기도 하였다.
영종도에 정박한 오페르트는 흥선대원군의 통치를 비판하면서 남연군 묘 도굴을 정당화하고, 통상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무력으로 대응하겠다는 협박의 내용이 담신 서신을 흥선대원군에게 보냈다. 이에 대하여 흥선대원군은 영종부 첨사 명의로 보낸 답신에서 남연군 묘 도굴을 비판하면서 위청척사를 정당화하고, 침략 협박에 굴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고종실록』 5년 4월 23일). 결국 오페르트는 조선을 개항시키겠다는 만용을 이루지 못한 채, 남연군묘 도굴이라는 침략자 모습만 남기고 조선을 떠나갔다.
오페르트는 세 차례 항해 경험을 토대로 1880년에 『금단의 나라 조선 기행』이라는 책을 독일어와 영어로 동시에 출판하였다. 그 책에서 오페르트는 자신의 세 차례 항해와 더불어 조선의 지리, 인종, 정치, 역사, 풍속, 관습, 종교, 언어와 문자, 상공업에 관해서 다루었다. 이 책은 초기 서구 열강이 조선을 이해하는 지침서 중 하나가 되었다.
저술 및 작품
『금단의 나라 조선 기행』
독일어본: Ein Verschlossenes Land. Reisen nach Corea. Nebst Darstellung der Geographie, Geschichte, Producte und Handelsverhältnisse des Landes, der Sprache und Sitten seiner Bewohner, F. A. Brockhaus, 1880.
영어본: A forbidden land: voyages to the Corea. With an account of Searle , and Rivington, 1880.its geography, history, productions, and commercial capabilities, &c, &c. S. Low, Marston,
Ostasiatische Wanderungen, Skizzen und Erinnerungen, Strecker und Moser (Stuttgart), 1898.
Erinnerungen eines Japaners: Schilderung der Entwicklung Japans vor und seit der Eröffnung bis auf die Neuzeit, Strecker und Moser (Stuttgart), 1898.
참고문헌
- 노계현, 「오페르트의 남연군분묘 도굴만행과 한국의 조치」, 『국제법학회논총』 27-1, 1982.
- 노혜경,「오페르트(E. Oppert)의 조선 인식」, 『역사와 실학』55, 2014.
- 박일근, 「젠킨스에 대한 주상해미영사재판-남연군 묘소 도굴사건에 관하여」, 『부산대학교논문집』 11, 1970.
- 오페르트, 신복룡·장우영 역주, 『금단의 나라 조선』, 집문당, 2000.
- 오페르트, 한우근 옮김, 『금단의 나라 조선기행』, 문교부, 1959.
- 원재연, 「오페르트의 덕산굴총사건과 내포 일대의 천주교 박해: 문호개방론과 관련하여」, 『백제문화』 29, 2000.
- 이영석, 「구한말 내한 독일인의 한국 이해-오페르트, 묄렌도르프, 분쉬의 경우」, 『독일어문학』 37,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