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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6 기준 최신판



왕릉이나 후궁·왕자 등의 원묘(園墓)의 제사 때 필요한 향과 땔감을 공급하기 위하여 능 부근에 지정한 산림.

개설

왕이나 후궁·왕자 등의 장례가 끝나면 해당 능이나 원묘의 관리와 각종 제사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위전(位田)과 향탄산을 지급하였다. 향탄산은 위전과 비슷한 기능을 갖기 때문에 향탄위산(香炭位山)이라고도 불리며, 제사 때 사용하는 향과 땔감을 조달하였다. 향탄산은 능관(陵官)이 적당한 곳을 골라 보고하여 정하였고, 향탄산으로 결정되면 그곳에 향탄산임을 알리는 표식을 세우고 타인의 이용을 금하였다.

내용 및 특징

향탄산의 운영은 조선의 산림정책 및 봉산의 지정과 궤를 같이 하였다. 조선전기에는 향탄산을 지정하되 뚜렷한 경계를 설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계 규정의 모호함 때문에 백성들의 산림 이용을 금지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권세가들이 산림을 사적으로 점유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불분명한 경계로는 향탄산을 유지할 수 없다는 위기감도 작용하였다. 그래서 조선 정부는 17세기 말 이후 봉산을 지정하여 타인의 이용을 금하였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향탄산도 경계를 확정하고 또 표식을 세워 다른 사람이 이용하는 것을 금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향탄산은 봉산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변천

향탄산과 같은 봉산정책은 다른 사람의 산림 이용을 제한·금지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보다 적극적인 산림 관리정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투장(偸葬)·개간·화전·산불·도벌(盜伐)·토석 채취 등을 금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향탄산 관리를 맡은 산직(山直)에게 향나무와 참나무를 기르는 의무를 부과한 점 등에서 보다 적극적인 산림 관리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말 이후 이러한 봉산정책은 보다 강조되었다.

참고문헌

  • 박봉우, 「봉산고」, 『산림경제연구』 4-1, 한국산림경제학회, 1996.
  • 배재수, 「조선후기 봉산의 위치 및 기능에 관한 연구」, 『산림경제연구』 3-1, 한국산림경제학회, 1995.
  • 배재수, 「조선후기 송정의 체계와 변천 과정」, 『산림경제연구』 10-2, 한국산림경제학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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