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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5 기준 최신판



한 마을이나 국가 등 특정 지역에서 그 지역을 수호하는 것으로 간주된 산.

개설

고대로부터 특정 지역에서 높이 솟아 있으면서도 주변을 감싸 안아 외부의 나쁜 기운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 같은 산을 진산이라 부르며 신성시하였다. 이는 산악신앙과 풍수설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역사 문화적 관념이다.

내용 및 특징

중국의 경우 일찍부터 사진오악(四鎭五嶽)의 신앙이 형성되어 경전에 자주 등장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4방 또는 5방의 통일적인 공간 관념 속에 산천을 배치시키는 것은 중국의 예제를 받아들이면서 나타나지만 특정 산에 대한 신앙은 일찍부터 있었다. 그러나 마을마다 진산을 두는 것은 고려말에서 조선초기부터 시작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전체 221개의 산이 실려 있는데 그중에서 109개의 진산이 보인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전체 331개의 군현 중에서 255개의 진산이 나타난다. 이렇게 조선전기에 이미 각 군현에서는 진산을 정하여 마을의 수호신으로 삼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진산은 해당 지역의 정치 행정의 중심인 도성과 관할 관청인 치소(治所)를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다. 고려시대에 치소는 산성 내부에 있어서 진산이 크게 발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점차 치소가 평지에 위치함으로써 후면에 있는 산을 진산으로 삼았다. 그리고 풍수설의 확산으로 어느 지역이든 입지조건으로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전주작(前朱雀), 후현무(後玄武)의 사신사(四神砂)를 갖추고자 하였다. 대개 진산은 풍수의 주산(主山)과 일치하였다. 주산은 풍수에서 사신사 중 북쪽의 현무에 해당하는 산을 가리킨다. 그러나 진산과 주산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았다. 명당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주산과 달리 거리가 멀더라도 치소에서 보이고 위엄이 있는 산이 진산으로 되기 때문이다. 한양의 경우가 주산과 진산을 달리하는 곳이다. 주산은 백악산인데 진산은 삼각산이었다. 이러한 진산은 마을을 수호한다고 믿어져 공동으로 제사를 지냈다. 진산은 외부의 적으로부터 보호해 줄 뿐 아니라 비를 내려주고 전염병도 막아주는 매우 복합적인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진산은 경작이나 무덤으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여 보호하였다.

변천

조선시대 국가 사전(祀典)에 악(嶽)이나 명산대천(名山大川)은 포함되었지만 국가의 진산은 없었다. 대한제국이 성립한 후에 오악(五岳)과 더불어 오진(五鎭)이 사전에 포함되는데 백악산(중), 오대산(동), 속리산(남), 구월산(서), 장백산(북) 등이었다(『고종실록』 7년 3월 19일).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정치영, 「조선시대 지리지에 수록된 진산의 특성」, 『문화역사지리』제23권 제1호, 2011.
  • 최종석, 「조선시기 진산의 특징과 그 의미-읍치공간 구조의 전환의 관점에서-」, 『조선시대사학보』45, 200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