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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5 기준 최신판



조선말기 개항장을 벗어난 조선 지역을 통행하고자 하는 외국인에게 발급해 주던 통행 허가증.

개설

조선은 1876년(고종 13) 일본과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체결하면서 개항을 하고 본격적으로 외국과의 통상을 시작하였다. 개항 이전까지만 해도 공식적으로 정부의 허가를 받고 조선 내지(內地)를 여행하거나 상행위를 하는 외국인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개항 이후 개항장이 설치되고 외국인이 거주하게 되면서 외국인의 내지 통행 문제가 대두되었다. 외국인들이 개항장 내의 규정된 거주지를 벗어나 자유롭게 내지를 통행할 경우 사회·경제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조선 정부는 이에 대한 대책으로 통행 허가증을 발급하기 시작하였다. 호조(護照)는 여행이나 상행위를 위해 내지 통행을 희망하는 외국인이 조선 정부에 신청하면 내용을 검토 후 발급해 주던 통행 허가증이었다.

내용 및 특징

호조는 1882년(고종 19) 조일수교조규(朝日修交條規) 속약(續約)이 체결된 이후 본격적으로 발급되기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예조(禮曹)와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에서 호조를 발급하였으나 이후 제도가 간소화되면서 각 개항장에서 지급해 주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호조의 사용기간은 보통 6개월이었으며 통행자의 이름·신분·통행지 등이 명시되었다. 호조의 발급료는 1명당 동전 15냥이었고, 호조를 소지해야만 개항장 이외 지역에서 자유롭게 통행이 가능하였다. 외국인의 내지 통행은 여행을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상업 활동을 위한 통행도 많은 부분을 차지하였다. 조선 정부는 개항 이후 무분별한 외국인의 상업 활동으로 인하여 국내 상인들이 피해를 입는 것을 경계하였다. 본래 허가 없이 개항장 밖에서 상업 활동을 하는 것은 금지되었지만 외국인의 내지 통행은 계속되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호조를 발급하여 외국인의 내지 통행을 일정 부분 통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변천

호조가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1866년(고종 3)이다. 청나라 예부(禮部)에서 보낸 온 자문(咨文)에 프랑스공사(公使)가 자국 선교사들이 조선에 갈 수 있도록 호조를 발급해 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하였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조선이 선교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호조를 발급해 주지 않았다(『고종실록』 3년 7월 8일). 1882년(고종 19) 조일강화조약(朝日講和條約)과 조일수교조규 속약이 체결되면서 제2관에 ‘일본국공사와 영사(領事) 및 수원(隨員)과 가족은 마음대로 조선의 내지 각 곳을 유력(遊歷)할 수 있다.’는 조항이 삽입되었는데, 이때 세부 규칙에 유력(遊歷)할 지방을 지정하면 예조에서는 호조를 발급하고, 지방관청은 호조를 확인하여 호송한다고 규정하였다(『고종실록』 19년 7월 17일). 이로써 국내에 체류하는 외국인에게 호조를 발급하는 규정이 마련되었으며, 이 조항은 이후 체결되는 조약에서도 적용되었다. 같은 해 체결된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 제4조 내지채판토화(內地採辦土貨)에서도 ‘조선과 청국의 각 상민(商民)들이 상대국의 내지(內地)에 들어가서 그 지방물화를 매입(買入)하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피차(彼此)의 상무위원(常務委員)과 지방관회(地方官會)에 신청하여 호조를 지급받아 이를 휴대하고 예정한 이정간(里程間)을 다닐 수 있다.’는 규정을 실었다. 이듬해인 1883년(고종 20) 체결된 조영수호조약(朝英修好條約) 제2관에서는 ‘양국이 파견하는 사신과 총영사관 등 일체의 수원(隨員)들에게 모두 상호 각 처를 돌아다니는 것을 허용하고 금지하지 않으며, 조선국에 있는 자에게는 대조선국의 관원이 호조를 발급하고 아울러 참작하여 사람을 파견해 호송함으로써 보호하는 뜻을 거듭 주도(周到)하게 한다.’고 규정하였다(『고종실록』 20년 10월 27일). 이 결과 호조는 조선과 조약을 체결한 모든 나라의 국민이 조선 내지를 통행하기 위하여 반드시 발급받아야 하는 증서로 자리 잡았다.

호조 발급을 희망하는 자가 각지의 소속국 영사관(領事館)에 신청하면 영사가 그 지방 관리를 경유해서 통리아문(統理衙門)에 제출하고, 통리아문에서 발급해 주는 방식의 다소 번거로웠던 발급 방식은 1894(고종 31) 4월부터는 각 항(港)의 감리관(監理官)이 날인(捺印)한 백지통행권(白紙通行券)을 미리 영사관에 비치해 두었다가 신청자가 있으면 영사가 이를 지급해 주는 방식으로 간소해졌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이광린, 『韓國開花史硏究』, 일조각, 1974.
  • 손정목, 「開港期 日本人의 內地浸透·內地行商과 不法定着의 過程」, 『韓國學報』 21, 일지사, 1980.
  • 이상오, 「舊韓末 開化期의 日本語 流入過程에 對하여」, 『人文硏究』 8집 1호,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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