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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4 기준 최신판



광화문 육조 거리와 연결되어 있던 종로 거리에 위치하던 교차로 정면의 언덕 지형을 지칭함.

개설

황토현(黃土峴)은 종로에 위치한 지형으로 경복궁 광화문에서 나와 숭례문(崇禮門) 즉 남대문을 통하거나 흥인지문(興仁之門) 즉 동대문, 돈의문(敦義門) 즉 서대문을 통해 도성 밖으로 나갈 때 반드시 지나가야 했던 곳이다. 또한 광화문 육조 거리에서 남쪽 방면을 가로막고 있던 곳이다. 조선시대 도성 지도에서 광화문 육조 거리에 인접한 종로는 십자로가 아니라 삼거리였다. 광화문을 나와 숭례문으로 가려고 한다면 종로 쪽으로 가서 대광통교(大廣通橋)를 지나 남쪽으로 가는 길을 택해야 했다. 동시에 경희궁으로 가려면 광화문을 나와 오른쪽으로 돌아 야주고개를 지나가는 길을, 창덕궁으로 가려면 종로 쪽으로 가서 파자전교(把子廛橋)를 좌회전해서 가는 길을 택해야 했다. 따라서 왕의 행행(行幸)이 있을 때는 이곳을 지나면서 동서남의 방향을 정해 행차로를 결정했다. 현재의 동아일보 구사옥과 동화면세점 사이에 위치하였으며, 광화문 광장의 일부이기도 하다. 1912년 조선총독부가 광화문에서 숭례문을 연결하는 태평로(太平路) 도로를 신설하면서 평토 작업을 하여 원래의 형태를 잃었고 지명도 사라졌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도성의 대표적인 도로는 첫째로 경복궁을 기준으로 한 육조 거리와 종로가 연결되는 황토현이 인접한 길, 둘째로 경희궁부터 동대문에 이르는 종로 거리, 셋째로 종로에서 대광통교를 지나 남대문에 이르는 길이다. 도성의 도로는 이 세 개의 노선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황토현은 조선초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 유지되던 지형이었다. 조선시대 지도를 보면 광화문에서 남대문으로 가는 길이 직선 도로가 아니라 대광통교로 크게 우회해서 가는 노선이다. 건국초기에 도로를 만들면서 황토현을 가로지르는 노선을 놓았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런 시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로 인해 풍수적 시각에서 황토현을 도성의 안산으로 보아서 유지했다고 하는 설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 진위는 알 수 없다.

다만 대한제국 선포 이후 고종이 경운궁에 거처하며 창덕궁에 행행하거나 순종이 이동할 때 이용하기 위해 경운궁 선원전 구역의 정문이었던 영성문(永成門)부터 경희궁 인근에 구름다리를 건설한 일이 있다. 경운궁의 정문인 대한문을 통해 종로로 접근하려면 대광통교를 지나야 하는 원거리였으므로 보다 쉽게 종로에 접근하려는 의도에서 구름다리를 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때에도 덕수궁 대한문과 직선거리에 있던 황토현의 도로화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따라서 일제시대 이전에 황토현은 조선왕조에게 보존해야 하는 공간으로 인식되었다고 여겨진다.

변천

1896년(건양 1)에 내부령(內部令) 제9호로 종로 거리인 황토현부터 동대문까지의 도로 규정을 개정하였다. 이때 종로는 국가의 큰 도로라고 하였으며 가옥들이 도로를 침범하는 것을 금지하였다(『고종실록』 33년 9월 29일).

1911년 이왕가에서 황토현 인근의 기념비각과 옛 기로소(耆老所) 토지 및 건물 등을 조선총독부에 인계하였다(『순종실록부록』 4년 11월 29일). 이로 인해 조선총독부가 황토현을 중심으로 한 도로의 개발이 추진되게 되었다. 1912에 태평로 공사를 위해 이왕가에서 덕수궁의 일부도 도로 용지로 총독부에 넘겨주어 건설이 진행되었고 황토현은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평지로 변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매일신보(每日新報)』
  • 『동아일보(東亞日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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