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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3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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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회회 |
한글표제 | 회회 |
한자표제 | 回回 |
상위어 | 유라시아 |
하위어 | 아라비아, 페르시아 |
동의어 | 대식(大食), 대식국(大食國) |
관련어 | 무슬림, 이슬람, 위구르, 회회력(回回曆), 회회세자(回回世子), 회회승(回回僧), 회회인(回回人), 회회청(回回靑), 회흘(回紇),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 |
분야 | 정치/외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중앙아시아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신명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회회(回回)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성종실록』 19년 1월 23일 |
이슬람교를 신봉하던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지역 및 중앙아시아 지역을 지칭하던 용어.
개설
당대(唐代) 이래로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지역은 대식(大食: 중국 발음으로 Tashih, 페르시아어로 아랍족 또는 대식국(大食國))으로 불리었다. 이후 요대에 중앙아시아의 민족을 부르는 회회(回回: 중국 발음으로 Hui-Hui)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회흘(回紇, [위구르])의 어음이 전화한 것이었다. 기왕의 대식국 사람, 즉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사람이나 중앙아시아의 회회 사람 중에는 공통적으로 이슬람교 신자들이 많았다. 이에 따라 원나라 때인 12세기부터는 대식이라는 명칭이 회회라는 명칭으로 대체되었고 나아가 이슬람교의 명칭 역시 회회교(回回敎)로 바뀌었으며 이슬람과 관련된 사람이나 물품에도 회회인(回回人)·회회승(回回僧)·회회세자(回回世子)·회회청(回回靑)·회회력(回回曆) 등 회회가 관칭(冠稱)되었다.
내용 및 특징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와 회회의 관계는 신라시대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당시의 회회는 대식국이라는 명칭으로 산견되는데, 이때의 대식국은 아라비아 지역은 물론 페르시아제국의 전 지역을 지칭하였다. 이어서 고려 때인 1024년(현종 15) 9월에 열라자(悅羅慈, [Al-Raga]) 등 100여 명, 다음 해 하세라자([夏詵羅慈], Hassah Raga) 등 100여 명과 1040년(정종 6) 11월에 보나합([保那蓋], Barakah) 등이 왔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들은 대식국에서 온 사람들로서, 대식이라는 명칭은 12세기에 들어와 회회라는 명칭으로 대체되었는데, 이는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의 영향으로 이슬람교 명칭이 회교 또는 회회교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회회라는 명칭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용되고 있다. 당시 중동 지역의 무역 상인으로서 고려에 출입한 회회 사람은 주로 예성강 하구 벽란도에서 교역하였는데, 가지고 온 상품은 주로 수은·향료·약재·소목(蘇木)·동(銅) 등이고 포도·포도주도 이때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한편 사가지고 간 상품은 금·은·포(布)·면(綿) 등이었다.
조선왕조가 건국된 후에는 중·근동 측 기록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기록에도 회회 상인들의 우리나라 출입에 관한 내용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대체로 15세기 이후 유럽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주도하는 지리상의 발견시대로 접어들면서, 지금까지 교량적 무역을 담당하던 아랍 무역권이 급격히 쇠퇴한 것과 동북아시아의 정세 변동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등장과 함께 회회 상인의 출입은 사라졌다고 해도 문화적 교류는 중국을 통하여 계속되었다. 그 예로 세종대에 편찬된 역법서(曆法書)인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이 있는데, 이는 바로 이슬람의 역법인 회회력을 소개한 것이었다[『세종실록』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 또한 조선시대 백자 중에서 가장 보편적이며 미술적인 가치 또한 높은 청화백자(靑華白磁)에 사용되는 푸른색 안료를 회회청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푸른색 안료의 원산지가 회회였기 때문이다. 조선초기에는 중국을 통하여 회회청을 수입하였는데, 이와 관련하여 『성종실록』에는 “한성부 판윤이극돈 등이 와서 아뢰기를, ‘화원(畫員) 이계진이 일찍이 공무역 하는 회회청의 값으로 흑마포(黑麻布) 12필을 받고서도 마침내 사오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본부로 하여금 그 본색(本色)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하여, 그의 가동(家僮)을 구속하였는데, 연루된 자가 수백 명이나 됩니다. 그러나 이계진이 환납(還納)하지 못하는 것은, 회회청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고 또 민간에서 쓰이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계진이 비록 죽게 된다고 하더라도 반납할 수 없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청컨대, 본색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흑마포를 배로 받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성종실록』 19년 1월 23일). 본색이란 전답에서 생산되는 벼·보리·밀·콩 등을 말한다.
변천
15세기 이후 한국인들이 회회 사람들과 재접촉한 곳은 만주였다. 일제가 만주 경영을 위하여 한국인들을 반강제로 만주에 이주시킨 결과 그 수가 1,000,000명에 달하였는데, 이 중 극소수가 그곳에 정착한 이슬람교도들과 접촉하여 이슬람을 알게 되고 일부는 그때 개종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일제 패망 뒤 귀국하여 뒤에 우리나라 안의 이슬람 정착에 선도적 구실을 하였다. 또한 터키군이 한국전쟁 때 참전함을 계기로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이들이 이슬람과 다시 접촉하였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유사(三國遺事)』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나종우, 「일본 및 아라비아와의 관계」, 『한국사』 15, 국사편찬위원회, 1995.
- 윤승용, 「이슬람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1991.
- 윤효정, 「朝鮮 15·16세기 靑畵白磁의 製作과 使用-문헌자료와 요지출토품을 중심으로-」, 『미술사학연구(구 고고미술)』 250·251, 한국미술사학회, 2006.
- 『한국역사용어시소러스』, 국사편찬위원회, http://thesaurus.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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