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구(勳舊)"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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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3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에 연로한 대신·공신, 또는 15세기 중반부터 1세기 동안 중앙의 재상직을 차지한 관료·공신 집단.

개설

‘훈구’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하나는 ‘원훈구신(元勳舊臣)’의 준말로 조선시대 전체에 걸쳐 원숙한 나이에 오른 대신·공신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다른 하나는 ‘사림파’와 상대되는 집단으로 15세기 중반인 세조 때부터 1세기 정도에 걸쳐 대신과 공신으로 정치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 일군의 지배 세력을 가리킨다. 첫 번째 개념은 가치 평가가 그리 개입되지 않은 객관적 표현으로, 당시에 실제로 사용된 용례를 바탕으로 추출한 것이다. 반면 두 번째 개념은 현대에 만들어진 개념으로, ‘사림파’의 긍정성과 대비되면서 부정적 의미를 많이 내포하고 있다.

내용 및 특징

그동안 한국사 연구에서 ‘훈구’는 주로 두 번째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 특징을 좀 더 설명하면, ‘훈구(파)’는 조선 건국에 공로를 세우거나 협력한 인물과 그 가문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들이 하나의 세력으로 나타난 것은 세조 때였다. 그들은 세조 무렵부터 고위직과 공신 책봉을 독점하면서 권력을 장악하여 정치적 집권 세력으로 성장해 1세기 정도에 걸쳐 위상을 유지했다. 아울러 그들은 경제적으로는 국가에서 내려준 공신전(功臣田)별사전(別賜田)을 비롯해 사적(私的)인 매입·겸병·개간 등의 방법으로 대규모의 농장과 노비를 소유한 부유층이었다. 사상·학문적으로는 대규모의 관찬사업(官撰事業)을 전개해 건국 이후의 다양한 제도 정비에 크게 공헌한 실용적 관학파(官學派)였다.

이러한 훈구파는 사림파와 거의 모든 측면에서 상반된다. 즉, 사림파는 영남과 기호 지방을 기반으로 형성되어 삼사(三司)를 거점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보수적 색채가 짙은 훈구파와는 달리 개혁과 혁신을 중시했으며, 경제적으로는 재지의 중소 지주였다. 사상·학문적으로도 사장(詞章)이나 제술보다는 성리학 이해와 실천을 중시했다.

훈구파는 16세기부터 정치적 부패와 경제적 치부(致富) 등에서 문제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사림파의 공격을 받아 점차 세력이 약해졌다.

변천

이런 이해의 이론적 기반은 1970년대부터 등장한 ‘훈구-사림론’이다. 그 이론은 사회의 변화와 지배층의 교체를 연결해 이해함으로써 한국사를 동태적으로 파악했다는 중요한 사학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는 그 이론의 일정한 실증적·논리적 허점을 지적하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가장 중요하게 지적되는 사항은 한국사의 전체적인 전개 과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사에서는 가장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는 왕조 교체 자체가 적었고, 그 교체도 이민족의 침입에 따른 붕괴가 아니라 내부 세력의 투쟁이 빚어낸 결과였다. 물론 지배층의 변화는 있었지만, 전면적이지는 않았다.

이런 역사적 전개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자 결과는 지금까지도 강고하고 복잡하게 남아 있는 친족 구조다. 주로 고려초기부터 시작하고 멀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한국의 주요 가문들은, 사실이든 아니든, 복잡하고 연속적인 계보를 형성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러므로 왕조 교체가 일어나지도 않은 15세기 후반에 ‘사림파’라는 새로운 사회 세력이 등장해 기존의 ‘훈구파’와 대립하다가 1세기쯤 뒤 그들을 물리치고 역사의 주도권을 잡았다는 방식의 설명은, 조선시대사를 역동적인 변화의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견고한 실증의 토대 없이 논리에 의지해 구축한 역사상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사림파’ 중에서 새로 등장한 가문 출신은 드물었고 대부분 기존의 주요한 가문 출신이라는 연구가 이런 판단의 실증적 토대를 제공한다.

최근에는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훈구’의 용례를 직접 검토해 그 원래 의미는 “나라에 큰 공훈을 세운 나이 많은 공신과 대신”이라는 ‘원훈구신’이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선조실록』 29년 8월 10일). 이런 ‘훈구대신’은 대부분 60세 이상으로 세자 이하가 자리를 피해 엎드리거나(『세조실록』 3년 4월 29일), 충의와 동일시될 정도로 존경받았으며 조정(朝廷)의 원로로서 주요 사안을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태종실록』 11년 9월 4일) (『인조실록』 7년 3월 3일). 즉 ‘훈구’는 중신(重臣)으로서 그 상징적·실제적 영향력을 충분히 인정받고 행사함으로써, 부정적 역기능에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긍정적 순기능을 좀 더 많이 발휘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훈구’는 그동안 다소 도식적이고 부정적으로 평가되어 온 경향을 벗어나 당시에 실제로 사용된 원래의 의미와 위상을 중시하는 쪽으로 이해의 방향이 변화하고 있다.

참고문헌

  • 김범,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훈구’의 용례와 그 분석」, 『동방학지』134, 2006.
  • 정두희, 「조선전기 지배세력의 형성과 변천-그 연구사적인 성과와 과제」, 『한국사회발전사론』(주보돈 외), 일조각, 1992.
  • Edward W. Wagner, 「이조 사림 문제에 관한 재검토」, 『전북사학』4,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