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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2 기준 최신판



양인 신분의 사람에게 양역으로 부과하던 포를 가호에 부과하려던 방법.

개설

유포론(儒布論)과 비슷한 시기에 나타난 호포론은 유포론보다 한 단계 발전한 방안이었다. 유포론은 양역은 그대로 두고 양역의 부담을 덜기 위하여 유생에게도 포를 징수하자는 방안이었다. 반면, 호포론은 양역을 없애고 그 대신 모든 집마다 포를 부과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반층도 포를 부담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호포론은 유포론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어차피 두 방안 모두 양반층의 저항을 극복해야 한다면 양역제를 그대로 두는 것보다는 없애는 것이 더 근본적인 해결책이므로, 결국 유포론은 사라지고 호포론이 남게 되었다.

내용 및 특징

모든 가호(家戶)에 포를 부과하자는 주장은 1656년(효종 7)에 병조 판서원두표(元斗杓)가 처음 제기하였다(『효종실록』 7년 2월 21일). 이때의 호포론은 양역의 폐단을 없애기 위한 양역변통책이 아니라 재정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 후 현종대에 이르러 이유태(李惟泰)·민시중(閔蓍重)·정지화(鄭知和) 등이 양역변통책으로 호포의 징수를 거론하였다.

숙종 초에 오가작통법이 시행되고 호패사목이 제정되어 숨어 있던 양인 장정을 색출해 내는 사업이 대규모로 진행되었다(『숙종실록』 2년 5월 25일). 이때 사업에 대한 저항이 일자 윤휴(尹鑴)가 양역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책으로 호포의 시행을 주장하였다(『숙종실록』 2년 1월 19일). 이를 계기로 호포론이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이후 1677년(숙종 3) 김석주(金錫冑)가 「호포의(戶布議)」를 지어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

호포는 1681년(숙종 7)에 김석주·이세화(李世華)가 주축이 되어 평안도에서 시험적으로 시행하기로 하였으나 시행 직전에 무산되었다(『숙종실록』 7년 12월 9일). 그 후 1698년(숙종 24)에 다시 거론되었다가 수그러들었다. 전면적인 개혁이 저항에 부닥치자 숙종 말년부터는 양역을 1필만 감하고(줄이고) 나머지 1필만 호포로 해결하자는 감필호포론(減疋戶布論)이 새롭게 제기되었다.

1750년(영조 26) 균역법이 제정되기 직전에도 영조는 호포의 시행을 적극 검토하였다. 그러나 결국 무산되고 감필결포론을 수용한 균역법이 완성되었다.

변천

호포제는 19세기에 접어들어 지역적인 편차를 보이면서 마을 단위로 포를 납부하는 동포제(洞布制)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초기의 동포는 본격적인 동포는 아니었다. 이른바 ‘구파(口疤)’라고 하는 기존 양역제의 빈자리를 면(面)·리(里)가 나누어 공동부담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 후로 동포제는 1862년(철종 13)의 민란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때의 동포제는 양역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미 세금이 된 양역 전체를 동 전체에 부과하는 것이었다. 그 후로 대원군 집권기인 1871년(고종 8)에 동포, 또는 호포라는 이름으로 전국 군현에 확대 시행되었다. 다만 이때에도 양반은 입역(立役)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물품으로 납부하는 경우에도 관인(官人)은 제외되었으며, 유학(幼學) 이하의 가호에만 부과되었다. 호당 부담액도 평민 가호보다 적었다.

양역이 특정 신분의 사람에게만 부과되었던 전근대적 부세 체제라면 호포제는 이를 부인하는 진보적인 세제 개혁안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중엽의 균역법 시행 단계에서는 채택되지 못하였다. 이후 진행된 사회 경제적 변화는 양역제를 실질적으로 해체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호포는 19세기의 부분적인 동포제를 거쳐 대원군 집권기에 전면적인 동포제·호포제로 나타났다.

참고문헌

  • 김용섭, 「조선후기 군역제 이정의 추이와 호포법」, 『성곡논총』 제13집, 1982.
  • 김재원박사회갑기념논총 편집위원회, 『김재원박사회갑기념논총』, 을유문화사, 1969.
  • 송양섭, 「19세기 양역수취법의 변화-동포제의 성립과 관련하여-」, 『한국사연구』 89, 1995.
  • 정연식, 「조선후기 ‘역총’의 운영과 양역 변통」,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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