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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1 기준 최신판



황해도 장연군괴림산에 있던 절.

개설

학림사(鶴林寺)는 신라시대 아도 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하지만 자세하지 않다. 숙종대에 김경유는 고려말에 원 순제가 고려에 가지고 왔다가 잃어버린 기자화상도(箕子畫像圖)를 학림사에서 찾았다고 주장하였다. 또 다른 기록에서는 기자화상도를 어떤 승려가 찾아서 학림사에 보관하고 있다가 훗날 인현서원에 보관하였다고 하였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황해도 장연군(長淵郡)괴림산(槐林山)에 소재한 학림사는 곡서사(鵠棲寺)라고도 불리며 신라 눌지왕 때 묵호자(墨胡子) 아도(阿道) 화상이 창건했다고 한다. 학림사에는 흰 닭과 지네에 관한 전설이 전하고 있다. 이 절에 운무(雲霧)가 끼는 날의 아침이면 승려가 한 사람씩 행방불명되었다. 승려의 수가 자꾸 줄어 5명밖에 남지 않았을 때, 어느 날 밤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흰 닭 두마리를 주면서 하는 말이 "이 두마리의 흰 닭을 잘 기르시오. 그러면 이 절의 괴이한 일이 생기는 원인을 알 수 있게 될 것이오."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5명의 승려들이 이 닭을 정성들여 기른 후부터는 괴이한 일이 생기지 않았으며, 2년 뒤에 흰 닭은 수 백 마리로 늘어났다. 흰 닭의 수효가 많아지자 울타리 밖으로 나가는 일이 많았으며, 저녁에 돌아올 때는 닭의 주둥이에 피가 묻어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승려들이 닭들을 따라가 보니 숲속에 있는 움막 같은 토굴 속으로 들어갔다. 그 토굴 속에는 큰 지네가 수없이 모여 있었는데, 흰 닭의 무리와 큰 싸움이 벌어졌다. 원래 상극상식(相克相食)의 동물인데, 닭의 세력이 크기 때문에 닭은 지네를 보면 대들어 잡아먹고, 지네는 죽은 닭만 있는 곳이면 모여들어 먹는 것이었다. 결국 흰 닭과 지네는 싸움 끝에 모두 죽었는데, 그 뒤로 절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한다.

(2) 조선시대

학림사와 관련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1714년(숙종 40)에 유생(儒生) 김경유(金景游) 등이 상소를 올려 학림사에서 발견된 기자(箕子)의 화상(畫像)을 본부(本府)에 묘향(廟享)할 것을 청하였다. 그 내용에 의하면, 원 순제(順帝)가 멀리 고려에 유람 왔을 때 은밀히 기자의 화상을 가지고 와서 문수암(文殊庵)에 봉안하였는데 오랜 세월이 흘러 그 소재를 알지 못하다가 학림사에서 발견했으니 사당에 향사(享祀)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숙종실록』 40년 7월 24일). 당시의 상소 내용이 사실이었는지 거짓이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임하필기』의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에 전해 오는데 여기서는 곡서사라고 하였다.

그 내용에 의하면, 1600년(선조 33)에 평안감사서성(徐渻)이 조맹부(趙孟頫)가 그린 ‘기자가 주나라 무왕(武王)에게 홍범(洪範)을 설명하는 그림’을 중국으로부터 얻어서 이를 인현서원(仁賢書院)에 보관하였는데, 명나라가 화사(畫師) 이신흠(李臣欽)을 보내와서 인현서원에 보관된 그림을 모사(模寫)하여 간 뒤에 진본(眞本)을 미처 봉안하지 못하고 있었다. 1626년(인조 4)에 정묘호란 때 진본은 잃어버리고 모사본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한씨(韓氏) 성을 가진 승려가 그 잃어버렸던 진본을 다시 얻어서 곡서사에 보관하다가 한연희(韓連希)에게 맡겼다. 그 뒤 1719년(숙종 45)에 한연희의 4대손 한진태(韓晉泰)가 이를 다시 인현서원에 봉안하였는데 모사본과 일치하였다.

또 『심리록(審理錄)』에 의하면, 1800년(정조 24)에 학림사의 승려 취은(就訔)이 권해천(權海千)이라는 사람과 구리 화로[銅爐]를 사는 문제로 싸우다가 죽게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자 관청에서 조사를 할 때 취은이 피살자가 자기 어미를 강간하려 했다고 거짓 진술을 하면서 죄를 벗어나려고 하였다. 이에 대해 형조의 계사(啓辭)에서는 학림사의 승려들은 평소 대부분 흉악하고 사나웠다고 평하였다.

(3) 근현대

학림사는 일제강점기까지 9칸의 보광전(普光殿)을 중심으로 동쪽에 보응당(普應堂), 남쪽에 무집당(霧集堂), 서쪽에 청심당(淸心堂), 북쪽에 심검당(尋劒堂)이 있었고, 천왕문(天王門) 및 42칸의 좌우 낭무(廊廡)와 해탈문(解脫門)·영송문(迎送門)·금강문(金剛門)·조계문(曺溪門)·불이문(不二門)·단속문(斷俗門) 등이 차례로 늘어서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전쟁 때 모두 소실되어 건물은 모두 없어지고 현재는 사적비와 5층의 석탑만 남아 있다고 한다.

참고문헌

  • 『심리록(審理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김용국, 『황해도지』, 황해도, 1970.
  • 사찰문화연구원 편저, 『북한사찰연구』, 한국불교종단협의회,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