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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0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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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준원전 |
한글표제 | 준원전 |
한자표제 | 濬源殿 |
상위어 | 진전(眞殿), 태조진전(太祖眞殿) |
관련어 | 경기전(慶基殿), 계명전(啓命殿), 목청전(穆淸殿), 봉선전(奉先殿), 영숭전(永崇殿), 집경전(集慶殿) |
분야 | 왕실/왕실의례/가례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조선 |
집필자 | 김지영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준원전(濬源殿)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조실록』 7년 2월 26일, 『태종실록』 10년 2월 12일, 『태종실록』 13년 12월 22일, 『세종실록』 25년 9월 13일, 『인조실록』 7년 3월 18일, 『인조실록』 19년 8월 30일, 『고종실록』 37년 5월 22일, 『고종실록』 37년 10월 14일, 『고종실록』 37년 11월 19일, 『고종실록』 37년 12월 1일 |
조선시대에 함경도 영흥에 있던 태조진전(眞殿).
개설
준원전은 함경도 영흥부 순안사 흑석리에 세운 태조진전이다. 이곳은 환조의 옛 집이며, 태조가 태어난 곳이다. 1398년(태조 7)에 창건하여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였다. 외방의 태조진전은 이 준원전을 비롯하여 평양 영숭전(永崇殿), 개성 목청전(穆淸殿), 경주 집경전(集慶殿), 전주 경기전(慶基殿) 등이 있었는데, 준원전과 전주 경기전 2곳만 조선후기까지 존속하였다.
성립 경위
1398년 성석린(成石璘)을 보내어 태조 어진을 당시 함주(咸州: 현 함경도 함흥)의 준원전에 봉안하였다(『태조실록』 7년 2월 26일). 1410년(태종 10) 전함(前銜) 품관 4인으로 하여금 진전을 수호하게 했다(『태종실록』 10년 2월 12일). 1413년(태종 13)에는 영길도(永吉道: 현 함경도) 준원전과 팔릉(八陵)에 도순문사(都巡問使)와 가까운 지경의 3품 이상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태종실록』 13년 12월 22일). 1443년(세종 25)에는 정인지(鄭麟趾)를 보내 다시 준원전에 태조 어진을 봉안하게 하였다(『세종실록』 25년 9월 13일). 이때 새로 태조 어진을 그려 봉안한 것인지 본래 준원전에 봉안하던 어진을 다시 그려 봉안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세종실록』 「오례」의 시일(時日) 조에는 준원전에 세시와 삭망에 제사하도록 했고, 축판(祝版) 조에도 세시와 삭망에 축판을 전하는 절차를 기록하고 있어 준원전의 진전 제향 의식이 세종대에 어느 정도 확립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준원전 등 진전에서 속절에만 5차례 제사를 지내도록 했으나, 숙종대 이후로는 납향제를 추가하여 6차례 제사를 지냈다.
변천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외방 진전이 파괴되고 태조 어진이 소실되었다. 준원전의 수복(守僕)들이 부(府)의 서쪽에 있는 요덕산(耀德山)으로 옮겨 겨우 위험을 면하였다. 어진은 1629년(인조 7) 준원전을 중수한 후 다시 봉안하였다(『인조실록』 7년 3월 18일). 병자호란 때 영흥의 유생 박효남(朴孝男)이 어진을 말응도(末應島) 안에 있는 뱃사공의 집으로 옮겨 모셔 보전하였고, 1641년(인조 19) 다시 준원전을 중수한 후 봉안하였다(『인조실록』 19년 8월 30일).
이렇게 외침의 와중에서도 무사히 보전한 준원전 영정은 뜻밖에도 조선 사람에 의해 파손되었다. 1837년(헌종 3) 준원전에 도둑이 들어 진전 안에 있던 여러 기물을 훔치는 데 그치지 않고 태조 영정을 찢어 훼손하는 일이 발생했다. 조정에서는 바로 태조 어진을 서울로 옮기고, 이한철(李漢喆)과 조중회(趙重晦)에게 새로 그리게 한 후 다시 봉안하였다. 1899년(광무 3) 12월 19일 고종은 태조·장종·정종·순조·익종을 황제로 추봉하는 의례를 거행했고, 12월 22일에는 원구단에서 태조 고황제를 하늘에 배향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이와 함께 선원전(璿源殿) 제1실에 태조 어진을 봉안하기로 하고, 준원전의 태조 어진을 옮겨 와 옮겨 그린 후 봉안하였다(『고종실록』 37년 5월 22일). 이 선원전 어진은 같은 해 10월에 불에 타 소실되었다(『고종실록』 37년 10월 14일). 다시 진전을 중수하고 어진을 모사하여 선원전을 복구하였는데, 이때 역시 태조실에는 준원전의 어진을 옮겨 그려 봉안하였다(『고종실록』 37년 11월 19일). 또 개성부의 목청전 또한 복구하기로 결정하고 이곳에도 준원전의 영정을 옮겨 그려 봉안하였다(『고종실록』 37년 12월 1일).
1907년(융희 1) 향사이정(享祀釐正)에 관한 칙령에 의해 영희전, 목청전, 화령전(華寧殿), 냉천정(冷泉亭), 평락정(平樂亭), 성일헌(誠一軒) 등 진전과 어진 봉안각에 모신 어진들을 선원전으로 옮기고 냉천정을 제외하고 나머지 전각들을 모두 국유화하였으나, 준원전은 왕실의 재산으로 보전하였다.
참고문헌
- 『춘관통고(春官通考)』
- 『영정모사도감의궤(影幀模寫都監儀軌)』
- 이성미·유송옥·강신항 공저, 『조선시대어진관계도감의궤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 김지영, 「숙종·영조 대 어진도사와 봉안처소 확대에 대한 고찰」, 『규장각』27, 2004.
- 김지영, 「19세기 진전 및 어진봉안처 운영에 대한 연구」, 『장서각』26,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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