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흥공신(中興功臣)"의 두 판 사이의 차이
sillokwiki
(XML 가져오기) |
(차이 없음)
|
2017년 12월 10일 (일) 02:40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중흥공신 |
한글표제 | 중흥공신 |
한자표제 | 中興功臣 |
상위어 | 공신(功臣) |
하위어 | 정공신(正功臣), 친공신(親功臣) |
동의어 | 구공신(九功臣) |
관련어 | 폐가입진(廢假立眞) |
분야 | 정치/인사/녹훈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고려 |
왕대 | 공양왕 |
집필자 | 신명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중흥공신(中興功臣) |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추대한 이성계 등 9명을 대상으로 1389년(공양왕 1) 12월에 책봉한 공신.
내용
1389년(창왕 1) 11월에 대호군김저(金佇)가 우왕의 밀지를 받고 이성계를 제거하려다가 발각되었다. 이를 계기로 이성계 등의 세력은 이른바 폐가입진의 명분으로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왕위에 앉혔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에 공양왕은 우왕과 창왕을 베고 자신을 추대한 이성계 등 9명을 중흥공신으로 책봉하였다. 최고의 포상을 받은 이성계는 화령군개국충의백(和寧君開國忠義伯)에 봉작되었고 식읍 1,000호에 식실봉 300호, 전 200결, 노비 20구를 받았다. 그다음의 포상을 받은 심덕부는 청성군충의백(菁城君忠義伯)에 봉작되었고 전 150결, 노비 15구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지용기 등 7명은 충의백에 봉작되었고 전 100결, 노비 10구를 받았다. 중흥공신은 9명이라 구공신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용례
恭讓告孝思觀 賜九功臣錄券 以太祖爲奮忠定難匡復燮理佐命功臣 爵和寧君開國忠義伯 食邑一千戶 食實封三百戶 田二百結奴婢二十口 其錄券依開國功臣裵玄慶例 稱中興功臣[『태조실록』 총서 107번째기사]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신명호, 『조선의 공신들』, 가람기획, 2003.
- 정두희, 『조선초기 정치지배세력연구』, 일조각, 1983.
- 박천식, 「戊辰回軍功臣의 책봉전말과 그 성격」, 『전북사학』 3, 1979.
- 박천식, 「조선 개국공신에 대한 고찰-책봉 과정과 대우를 중심으로」, 『전북사학』 1, 1977.
- 한영우, 「조선 개국공신의 출신에 대한 연구」, 『조선전기사회경제연구』, 을유문화사,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