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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0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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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초계문신 |
한글표제 | 초계문신 |
한자표제 | 抄啓文臣 |
상위어 | 과거(科擧) |
관련어 | 규장각(奎章閣), 독서당(讀書堂), 사가독서(賜暇讀書), 월과문신(月課文臣), 전경문신(專經文臣) |
분야 | 정치/인사/선발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차미희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초계문신(抄啓文臣)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정조실록』 즉위년 5월 24일, 『정조실록』 5년 2월 18일 |
정조대 이후 규장각에 소속되어 재교육을 받은 연소한 문신.
개설
정조는 영조의 뒤를 이어 정치적으로는 탕평책(蕩平策)을 이어 나가면서도, 그 실제 운영의 내용을 달리하고자 문풍(文風)의 진작을 꾀하였다. 문화 정책을 수행하는 기관으로는 규장각(奎章閣)이 부상되었으며, 문치(文治)를 구현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 초계문신(抄啓文臣)의 제도가 마련되었다. 의정부에서는 참상(參上)·참하(參下)의 당하관(堂下官)으로서 문과급제 이후 승문원(承文院)에 분관(分館)되고, 나이는 37세 이하의 연소한 문신을 선발하여 규장각에 위탁 교육을 시키고, 40세가 되면 졸업시키도록 한 것이었다. 19세기 전반 공경대부(公卿大夫)의 태반이 초계문신 출신이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의 정치적 비중과 활동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내용 및 특징
정조는 즉위 이후 ‘계지술사숭유중도(繼志述事崇儒重道)’라는 시정 방침을 표방하며, 문풍(文風)을 진작시킬 수 있는 문화 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해 갈 수 있는 기관으로서 규장각을 내세웠다. 세조대 발의되고 숙종대 종정시(宗正寺)에 부설하여 여러 선왕들의 어제(御製)와 어서(御書) 등을 봉안하던 소규모의 도서관 성격의 규장각을 국가권력과 문화의 핵심 기관으로서 재구성한 것이었다(『정조실록』 즉위년 5월 24일).
규장각을 중심으로 문풍을 진작하고 문치를 구현할 인재를 양성하는 방안도 마련되었는데, 그것이 초계문신(抄啓文臣)의 제도였다. 초계문신이라는 말은 문신 중에서도 다시 일부를 선발하여 교육을 시킨다는 의미인데, 실제로 선발 대상이 된 것은 참상·참하의 당하관으로서 문과급제 이후 승문원에 분관되고, 나이는 37세 이하의 연소한 문신이었다. 선발 주체는 의정부였으며, 의정부에서는 문신을 선발하여 규장각에 위탁 교육을 시키고, 40세가 되면 졸업시키도록 하였다(『정조실록』 5년 2월 18일). 이 제도의 법적 근거는 『경국대전』의 「예전(禮典)」 장권(奬勸) 조항의 ‘월과문신(月課文臣)’ 내지는 ‘전경문신(專經文臣)’에 두고 있다. 이는 조선전기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제도나 독서당(讀書堂)의 제도를 시대에 맞게 재편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교육과정은 사서삼경(四書三經)의 성리학적 칠서(七書)를 읽은 뒤 구두시험을 치르고, 경서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글을 짓도록 하여 평가하는 강제(講製)가 핵심이었다. 경서가 주요 교과로 채택된 것은 문과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당시 문과에 급제한 사람들 대부분이 경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글 역시 과문(科文)이라 하여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문제 인식 속에서 초계문신에게는 심성론(心性論)에 대한 지나친 공리공담(空理空談)을 배제하고, 과문을 위한 사장학(詞章學)을 견제하여 구두(句讀)보다는 문의(文義)에 치중하여 경전의 참뜻을 궁구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경서에 대한 구두시험은 매달 15일 전과 20일 후 두 번 행해졌고, 제술문에 대한 평가는 20일 후에 한 번 실시되었다. 정조가 직접 교육에 임하는 친강(親講)은 매달 20일경에 적당한 날을 잡아 거행하고, 왕이 직접 시험을 보이는 친시(親試)는 매달 초하루에 행하였다. 1년 중 가장 추울 때와 더울 때에는 집에서 글을 지어 바치는 규정을 두어 학문 정진을 세심하게 배려하였다.
친강과 친시는 왕이 연소한 문신의 학문을 직접 독려하는 계기가 되었고, 왕이 문신의 학문적 능력과 정치력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면서, 초계문신들은 자연히 이후 왕의 정치적·문화적 지향을 실현해 나가는 친위 세력이 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정약용(丁若鏞)·김조순(金祖淳) 등이 모두 초계문신 출신이었다.
변천
초계문신은 1781년(정조 5) 시작되어 1800년 정조가 죽을 때까지 10차에 걸쳐 총 138명이 배출되었다. 그 뒤 중단되었다가 1848년(헌종 14)에 다시 시작, 2회에 56명을 뽑았다. 모두 12번에 걸쳐 194명이 초계문신으로 선발되어 재교육을 받은 것이었다. 19세기 전반 공경대부(公卿大夫)의 태반이 이들 초계문신 출신이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의 시기에 있어서 초계문신 출신 관원들의 비중과 활동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규장각지(奎章閣志)』
- 『문신강제절목(文臣講製節目)』
- 정옥자, 『조선후기 문화운동사』, 일조각, 198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