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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39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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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조왜국 |
한글표제 | 조왜국 |
한자표제 | 爪哇國 |
상위어 | 남만(南蠻), 남번(南藩) |
하위어 | 몽국왕(蒙國王), 번인(蕃人) |
동의어 | 자바국 |
관련어 | 남지나해, 대만(臺灣), 박다(博多), 안남(安南), 우다전(宇多殿), 천주(泉州), 향산오(香山澳) |
분야 | 정치/외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동남아시아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신명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조왜국(爪哇國)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6년 8월 11일 |
조선시대에 인도네시아 자바 지역을 지칭하던 용어.
개설
1391년(공양왕 3)에 섬라곡국에서 정사 나공(奈工) 등 일행 8명이 와서 국서와 토산물을 진헌하면서 우리나라와 동남아 사이에 공식적인 교류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동남아시아와의 교류는 조선초기에도 이어졌다. 조선초기 내빙한 동남아시아 국가는 섬라곡국을 위시하여 조왜국(爪蛙國)·구변국(久邊國) 등 세 나라였는데, 조왜국은 섬라곡국을 뒤이어 조선에 사신을 보냈다. 조왜국 사신이 조선에 올 때는 직항로보다 주로 일본을 경유하였는데 왜구의 약탈이 심하였기에 조선초기의 사절 이후에는 더 이상 내빙하지 않았다.
내용 및 특징
전근대 동양사회에서는 오늘날 동남아시아에 해당하는 국가들을 총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한편 당송대에는 현재의 아라비아에 해당하는 대식국(大食國)도 남만에 포함되었고, 명대에 이르러서는 포르투갈·스페인·이탈리아 등 서양 국가들에 대하여도 남만이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그들이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경유해서 내항하거나 무역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14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정치적 상황은 중국에서는 원명 교체기였고 일본은 남북조시대였다. 이러한 혼란기를 틈타 동아시아에는 해양 세력들이 성장하였으며 동남아시아의 해상교통은 활기를 띠었다. 왜구가 극성을 부렸던 것도 이 시기였다.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유구의 상인들은 명의 해금정책이라는 조건하에 중국·조선·일본에 남방물산을 교역하거나 혹은 중계무역을 하면서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고려말, 조선초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 그들은 적극적으로 우리나라에 접근하면서 통교를 제의하기도 하였다.
동남아 국가들이 조선으로 오는 항해로(航海路)를 보면, 해류와 바람에 순응하여 각기 본국으로부터 안남-남지나해-향산오(香山澳, 마카오)·광동·천주(泉州) 혹은 대만-대만해협-팽호도-유구-일본의 박다(博多)라는 코스를 거쳐 조선에 이르렀다. 그런데 당시 동남아 국가들의 항해 기술이나 배의 성능을 고려할 때 직접 조선까지 오는 경우보다는 유구나 일본의 박다를 경유하면서 그들을 통해 중계무역을 하는 방법이 일반적이었다. 이것은 당시 『조선왕조실록』 등 역사 기록을 통하여 확인된다.
역사 기록상 동남아시아 국가 사절이 최초로 내빙한 것은 고려말이었다. 1391년에 섬라곡국에서 정사 나공(奈工) 등 일행 8명이 와서 국서와 토산물을 진헌하였다. 그런데 이때의 국서에는 성명과 봉인(封印)이 없어 진위에 대한 의심이 있었다. 그래서 국서는 접수하지 않고 사신의 인견만을 허락하였다. 3중의 통역을 거쳐 겨우 의사소통이 되었는데, 태국의 사신은 3년 전에 왕명을 받아 출발하여 일본에 1년간 체류하다 고려에 도착하였다고 하였다.
변천
조선초기 조선에 내빙한 동남아 국가는 섬라곡국을 위시하여 조왜국·구변국 등 세 나라였다. 1406년(태종 6) 8월에 조왜국 사신 진언상(陳彦祥) 일행이 왔다. 그런데 그들은 조선으로 오던 도중 군산 부근의 해안에서 왜구의 습격으로 가지고 오던 예물인 타조, 공작, 앵무새, 잉꼬 호초, 소목, 향 등 약재와 번포(蕃布) 등을 약탈당하였으며, 일행 중 21명이 전사하고 60명이 사로잡힌 채 남녀 40명만 전라도 군산에 도착하였다(『태종실록』 6년 8월 11일). 이들에 대하여 조선에서는 17명은 상경시켜 접대하고 배 위에 남아 있는 자들에게는 의복 등을 지급하면서 보호해 주었다. 이들이 가지고 온 국서를 보면 본국의 왕을 몽국왕(蒙國王), 스스로를 번인(蕃人)으로 자칭하며 통교를 요청하였다. 그런데 진언상은 1394년에 섬라곡국 즉 태국 사신과 동행하여 조선 정부로부터 직첩을 받았던 인물로서, 그의 행적으로 보아 조왜국 사람인 것은 사실이지만 동남아시아에서 일본을 경유하여 중개무역을 전문으로 하던 국제무역상일 가능성도 있다. 이들 일행이 귀환할 때 태종은 의복과 양식을 지급하는 등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조왜국은 이때의 약속대로 6년 후인 1412년 다시 사신을 파견해 국서와 토산물을 진헌하였다. 이들이 돌아갈 때 일본의 우다전(宇多殿) 사절과 동행하게 되자 일본인들에게 다시 약탈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조선에 병선으로 호위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조왜국 역시 섬라곡국과 마찬가지로 조선과의 통교에 적극적이었지만 계속 왜구에게 침탈당하자 이후에는 사절파견을 중단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37, 탐구당, 2000.
- 정면, 「‘南蠻’ 및 ‘海南’ 諸國과 隋唐代 중국의 국제관계」, 『동북아역사논총』 35, 동북아역사재단, 2012.
- 하우봉, 「동남아시아 국가와의 관계」, 『한국사』 22, 국사편찬위원회, 1995.
- 하우봉, 「유구와의 관계」, 『한국사』 22, 국사편찬위원회, 1995.
- 하우봉, 「일본과의 관계」, 『한국사』 22, 국사편찬위원회, 199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