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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38 기준 최신판



물고기를 잡기 위해 물길을 따라 나무로 울타리를 만들고 한편에 함정을 설치한 어구의 일종.

개설

함정어구류에 속하는 어구(漁具)의 일종이다. 어전의 구조는 바다에서 육지를 향해 방사형 또는 활처럼 굽은 모양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기둥을 세우고, 여기에 대, 싸리, 나뭇가지, 등으로 엮은 발을 묶었다. 그리고 양 날개가 맞닿는 중앙부의 한곳, 또는 중앙 및 좌우 날개의 각 한곳에 함정 장치인 임통을 설치하는 형태였다. 간만의 차가 큰 내만 또는 간석지에 설치하여 만조 시에 들어온 어해류가 퇴조 시에 조류를 따라 이동하다 발의 양 날개에 막혀 바다로 나가지 못하고 결국 함정 장치에 빠지면 긴 자루가 달린 초망 또는 작살 등으로 잡아 올리는 방식이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전기까지는 어량(漁梁, 魚梁)으로 일컬었으며, 흔히 양(梁)이라고 약칭하였다. ‘양’은 원래 교량이라는 뜻이나, 하천을 가로질러 어량을 설치한 모양이 마치 교량과 같이 보이므로 어량이라는 뜻으로 빗대어 쓴 것이다. 그러다가 해양에서 발을 설치하여 고기를 잡는 어구가 생기자 이것도 하천 어량의 명칭을 따라 어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고려시대까지는 모두 ‘魚梁’이라고 쓰다가 조선 개국 초에는 ‘魚梁’ 또는 ‘漁梁’으로 썼다. 그런데 성종 이후로는 어전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썼다. 하천어전은 그 어법이 하천의 물살과 어구장치를 이용하여 어획 대상을 강제적으로 함정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므로 그 어구는 강제함정어구라고 할 수 있다.

반면 해양어전의 구조는 바다에서 육지를 향해 방사형 또는 활처럼 굽은 모양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기둥을 세우고, 여기에 대, 싸리, 나뭇가지, 등으로 엮은 발을 묶었다. 그리고 양 날개가 맞닿는 중앙부의 한곳 또는 중앙 및 좌우 날개의 각 한곳에 함정 장치인 임통을 설치하는 형태였다. 해양 어전은 밀물 때에 연안으로 들어와 있다가 썰물 때 빠져나가는 어류나 기타 수산동물의 퇴로를 어전의 양쪽 날개 부분이 차단하여 이를 함정부분으로 유도하여 어획한다. 그러므로 이는 유도함정어구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 강제함정어구인 하천어전과 어법(漁法) 상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해양어전은 조수간만의 차가 큰 서해안에서 발달하였고, 상대적으로 동해안에서는 발달이 부진하였다.

어전의 규모는 일반적으로 하천어전은 소규모인 데 반하여 해양어전은 규모가 컸다. 그러나 해양어전도 그 설치 장소, 어획대상, 설치 목적 등에 따라 규모의 차이가 컸다. 조선시대에 조기나 청어 등의 대량 어획을 위해 서해안에 설치하였던 것은 그 규모가 상당히 컸던 데 반해 자가소비용 어류의 어획을 위해 설치된 것은 규모가 작았다. 당시의 대어전은 양쪽 날개의 길이가 수백 미터에 달하는 것도 있었다. 반면 함정 부분이 없는 비교적 간단한 소규모의 원시적 어전도 있었다.

변천

어전을 설치하여 수산동물을 어획하는 어전어업은 세계 도처에서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대체로 자재가 구하기 쉬운 것이고, 구조와 설치 방법도 간단했으므로 어전 설치에 필요한 자연적 조건이 구비된 곳에서는 쉽게 어전어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선사시대부터 어전어업을 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어전어업의 발달 순서를 보면 하천어전어업이 먼저 발달하였다. 그러나 해양어전어업이 발달함에 따라 하천어전어업은 점차 그 비중이 낮아졌다. 조선전기에 어량에서 어전으로 명칭이 바뀐 것도, 어전어업의 비중이 하천어업에서 해양어전으로 옮겨진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어전어업이 가장 발달한 지역은 서해안 일대였다. 서해안은 갯벌이 발달되어 있고 조수의 간만차가 크기 때문에 해양어량 설치에 알맞은 조건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전 어업은 막대한 이익이 보장되었기 때문에, 토지와 함께 권문세가의 점탈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휘리를 비롯한 그물을 이용한 어업이 발달하고, 다양한 어법이 도입되면서 어전어업은 그 비중이 낮아졌다. 일제강점기 초기만 해도 2,000통에 가까운 어전이 설치되어 있었다.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 따르면, 1912년 말의 어전 수는 1,773통 그리고 1942년 말은 1,059통이 있었다고 한다. 비록 그 상대적 비중은 크게 낮아졌으나 일제강점기 말기까지만 하더라도 여전히 상당한 수의 어전이 설치되고 있었던 것이다. 광복 이후에도 어전어업은 점차 쇠퇴되어 각종 어업통계에서 기타 어업의 범주에 속하는 어업으로 전락하였다.

근대적인 어업의 발달에 따라 재래식 어업인 어전어업은 점차 밀려나게 되었다. 또 연안자원이 나날이 줄어들면서 연안에서 어획대상을 수동적으로 어획하는 어전어업은 그 자체의 존립기반을 상실해갔다.

참고문헌

  • 박구병, 『韓國漁業史』, 정음사, 1975.
  • 최승희, 『한국수산사』, 수산청, 1966.
  • 이영학, 「조선후기 어업에 대한 연구」, 『역사와 현실』35, 한국역사연구회, 2000.
  • 이욱, 「조선후기 어염정책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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