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차(電車)"의 두 판 사이의 차이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XML 가져오기)
 
(차이 없음)

2017년 12월 10일 (일) 02:38 기준 최신판



1899년(고종 36)에 한성전기회사가 운행한 전차로, 서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한국 최초의 노면 전차.

개설

서울에 최초로 전차 부설 및 전등, 그리고 전화 가설과 그 운영에 관한 특허를 받은 것은 미국인 콜브란과 보스윅이었다. 이들은 황실과 공동 출자로 1898년(고종 35) 2월 19일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 10월 17일 기공하여 12월 25일 서대문에서 종로, 동대문을 거쳐 청량리에 이르는 5마일 단선 궤도와 가선공사(架線工事)를 준공하였다. 전차 운행을 위한 동력 조달을 위해 동대문 안에 발전소 시설을 마치고 1899년 5월 17일 최초로 전차 개통식이 거행되었다.

내용 및 특징

전차는 전기를 동력으로 하여 미리 설치된 궤도 위를 달리는 도시의 교통수단이다. 이를 위해서는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소가 있어야 하고, 발전소에서 송전된 전기는 전주(電柱)와 가공선(架空線)을 통해 전차에 전달된다. 지하나 고가가 아닌 일반 도로면을 달리기 때문에 노면 전차라고도 한다. 처음 전차가 도입되었을 당시에 속력 또한 시속 20㎞ 정도로 요즈음에 비하면 빠른 편이 아니었다.

세계 최초의 노면 전차는 1879년 베를린박람회에서 독일인 지멘스가 도입한 전차로, 1881년 베를린에서 도시 교통수단으로 실용화되었다. 동양에서는 1890년 도쿄[東京] 우에노공원[上野公園]에서 처음 선보였고, 교통수단으로는 1894년에 교토[京都]에서 처음 등장하였다. 이후 벳푸[別府]에서도 사업이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최초로 전차가 운행된 것은 1899년의 일이었다.

서울에 최초로 전차 부설 및 전등 그리고 전화 가설과 그 운영에 관한 특허를 받은 것은 미국인 콜브란(H. Collbran)과 보스윅(H. R. Bostwick)이었다. 이들은 한국 황실과 공동 출자로 1898년 2월 19일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하였다. 황실에서는 40만원과 35만원을 두 차례로 나누어 출자하기로 하고, 고종황제의 칙명을 받은 이학균(李學均)과 콜브란·보스윅 사이에 계약이 체결되었다.

콜브란과 보스윅은 서울의 전차, 전등 및 전화 가설과 그 운영에 관한 특허권을 얻게 되자 우선 전차 가설을 계획하였다. 일본인 기술자들을 초빙하여 1898년 10월 17일에 공사를 일으켜 같은 해 12월 25일에 서대문에서 종로, 동대문을 거쳐 청량리에 이르는 5마일 단선 궤도 및 가선공사(架線工事)를 준공하였다. 전차 운행을 위한 동력을 조달하기 위해 동대문 안에 발전소 부지를 선정하고 75㎾ 직류 600V 1대, 100마력의 증기 발전 시설을 설치했다. 차량의 조립도 마쳤다.

궤도, 가선, 발전 시설, 차량이 갖춰지고 1899년 5월 17일 40인승 전향식개방차(轉向式開放車) 8대와 황제어용(皇帝御用) 귀빈차 한 대로 전차 개통식을 거행했다. 개통식 날 귀족, 고관, 각국 사신 및 관원, 기타 민간 유력자 다수를 초대하여 화려하게 장식된 전차에 나누어 탑승시킨 뒤 운행을 시작하자, 4월 초파일에 놀러 나와 있던 많은 시민들이 놀라면서도 즐겼다고 한다. 하지만 전선로가 사람들로 메워져, 그 때문에 전차가 여러 번 멈춰야 했다.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전차 운행은 성황이었다. 하지만 때마침 날씨가 가물어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맑은 날이 계속되자 전차가 공중의 수기(水氣)를 모두 흡수해버렸기 때문이라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개통 후 10일째 되던 5월 26일에는 교통사고도 발생했다. 동대문에서 서대문 방면으로 달려가던 전차가 종로 포전병문(布廛屛門) 앞(현 종로 2가)에 다다랐을 때 마침 궤도를 건너던 다섯 살 어린아이가 전차 바퀴에 깔려 죽은 것이다. 이에 광란을 일으킨 어린아이의 아버지가 도끼를 들고 전차에 달려들었고, 전차는 이를 피해 질주를 계속하려고 해 이를 지켜보던 군중의 격노를 샀다. 군중은 차장과 운전수를 향해 돌진했고, 차장과 운전수는 전차를 버리고 도주했다. 군중은 방치된 전차를 파괴하고 그 위에다 불을 질러 전차를 태워버렸다. 뒤따라오던 다른 한 대의 전차도 전복시키고 불을 질렀는데, 전복된 전차에서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어 군중은 발전소로 달려가 발전 설비를 부수려고 했다. 전기회사의 미국과 일본 사원들이 무장하고 공포를 쏘며 이를 저지하고, 경무청은 순검을 파견하여 진압에 나섰으나 군중이 불어난 탓에 여의치 않았다. 회사 측은 서둘러 발전소 둘레에 철조망을 두르고 600V의 강한 전류를 흘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이 과정에서 군중들도 냉정을 되찾아 하나둘 자진 해산하였다. 고종황제는 이때 발생한 사상자를 찾아내 구휼금을 지급하도록 하고, 법을 만들어 전차로 인한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지시했다(『고종실록』 36년 5월 27일). 1907년에는 동대문과 남대문 문루의 좌우 성첩을 각각 8칸씩 헐어 전차가 드나드는 선로를 만들어 사고의 위험성을 줄이도록 윤허했다(『고종실록』 44년 3월 30일).

변천

한성전기회사는 1898년에 전차 선로를 종로 네거리에서 남대문까지 연장하고 다음해 1899년에는 다시 구용산(현 원효로 4가)까지 연장하기로 결정했다. 연장 공사는 1899년 1월에 기공하여 1900년 1월에 준공했다. 1월 9일과 10일 이틀 동안 정부 고관들을 초청해서 시운전을 가진 뒤 연장선을 개통하였다. 이에 앞선 1899년 9월 18일 인천과 노량진 사이의 경인철도가 개통되었는데, 일본인 중에 노량진에서 용산까지 궤도를 깔아 손으로 미는 토로코[手押式人車鐵道]로 승객을 운반하는 것을 업으로 하는 자가 생겼다. 1900년 11월 12일 한강철교가 개통된 뒤에는 서울 시내에서 용산까지는 전차로, 거기서 노량진까지는 수압식 궤도차로, 노량진에서 인천까지는 철도로 수송되는 임시적 일관 수송 체계가 이룩되었다.

한성전기회사는 전차 승객이 늘어나 기업의 채산성이 좋아지자, 1901년(광무 5) 7월에는 남대문에서 서소문을 거쳐 서대문에 이르는 의주로에도 전차 선로를 부설했으나 수지가 맞지 않아 2~3년 뒤에는 철폐해버렸다. 연이은 시설 확장에 자금난에 빠진 한성전기회사는 1904년(광무 8) 한미전기회사로 이름을 바꾸고 본사를 미국에, 지사를 서울에 두었다. 한국 황실의 출자는 당초의 공동 출자에서 단순 투자로 성격이 변화했다. 하지만 자금난은 호전되지 않았다. 한미전기회사는 1909년(융희 3) 신설된 일한와사주식회사에 회사를 매각했다. 매매 계약이 성립된 것은 1909년 6월 23일이었고, 매각 대금은 120만원이었다.

한미전기 매각 당시 서울의 차량 수는 객차가 37대(그 중 한 대는 귀빈차, 나머지는 오픈카)였고, 화물 운반차는 13대였다. 하루 평균 승객 수는 약 370명 정도였다고 한다. 한미전기를 흡수한 일한와사는 1909년 7월 27일자로 일한와사전기주식회사로 명칭을 바꾸고, 같은 해 11월 마포 발전소의 용량을 늘려 사세를 확장시켜갔다. 일제강점 직후인 1910년 8월 26일에 종로-남대문로-동자동간 전차를 복선으로 한 데 이어 창경원선, 을지로선, 왕십리선, 충무로선 등을 신설하는 외에 1910년 이전에 부설된 본선, 즉 서대문-청량리간 가운데 종로-동대문간의 복선화 공사 등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일한와사전기는 1915년 9월 11일에 개최된 제14회 정기 주주총회에서 회사명을 경성전기로 개칭하였다. 이후 승차 인원도 늘고 영업 연장도 늘어나 객차 수입도 증가하였다. 1925년 하루 평균 승차 인원은 9만명에 달했고, 1928년에는 약 108,000명에 육박했다. 호황이 1920년대 동안 내내 계속되었다. 이러한 1920년대 전차 영업의 호황을 기반으로 1929년에서 1931년 사이에는 전등·전차·가스의 부영화(府營化) 문제가 대두되기도 했다.

참고문헌

  • 손정목, 『일제강점기 도시사회상 연구』, 일지사, 1996.
  • 손정목, 『한국 개항기 도시사회경제사 연구』, 일지사,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