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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38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과거에서 소과초시를 치르기 전에 거쳐야 했던 『소학』 고강을 통과하였다는 증명서.

개설

조흘(照訖)이란 ‘확인필’의 뜻으로, 과거를 보기 전에 과거 응시에 결격 사유가 없는 자인지 확인하고 『소학』을 고강(考講)하여, 과거에 응시할 수 있다는 증명서를 발급받아야 녹명(錄名)하고 과거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때 실시하는 『소학』에 대한 고강을 조흘강이라고 하는데, 이를 통과하였다는 증명서가 조흘첩이었다(『인조실록』 1년 9월 24일).

내용 및 특징

조흘첩의 기재내용은 지방과 중앙의 것이 대동소이했다. 응시자의 직역·성명 및 연령, 거주지, 소학 입격, 상투적인 규식 문구[置帖文成給爲遣合下仰照驗施行須至帖者], 발급 연월일, “조흘” 표기, 발급 주체, 서압(署押) 등이 그것이었다.

이 가운데 응시자의 직역·성명 및 연령, 거주지, 발급 연월일, 서압 등 이외에는 미리 인쇄된 양식으로 준비되어 있는 것이었다. 즉, 이런 조흘첩 양식이 빈번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에 미리 인쇄해 둔 것이었다.

또한 발급 연월일 바로 옆에 ‘조흘(照訖)’이라고 명기하여, 이 문건이 학례첩 등 다른 첩문이 아니라 ‘조흘첩’임을 분명히 표시해 놓았다.

    1. 00016217_그림1_송재린의 조흘첩, 1814년

변천

조흘강은 소과회시 전에 치르는 구술시험 학례강(學禮講)이나 대과회시 전에 치르는 구술시험 전례강(典禮講)처럼 조선초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명종대에 시작되어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양대 전란을 거치면서 안정적 제도로 정착되었다. 이후 조흘첩은 소과 응시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문서였다.

조흘강을 통과하였다는 증명서인 조흘첩은 과거장에 입장할 때 필요하였던 것은 물론이고 입장한 후에도 그 소지 여부를 점검하였으며, 심지어는 퇴장할 때도 검열하도록 하는 등 점점 더 엄격해졌다(『순조실록』 18년 5월 29일). 이런 검열의 결과 허위 문서를 소지하거나 조흘첩이 없이 입장한 자는 군역에 충정(充定)시켰으며, 조흘강을 대신 고강하였을 경우에는 수군(水軍)에 충정하는 처벌을 가하였다(『정조실록』 24년 4월 30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육전조례(六典條例)』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과거사목(科擧事目)』
  • 『과시등록(課試謄錄)』
  • 『상정과거규식(詳定科擧規式)』
  • 『은대편고(銀臺便攷)』
  • 김경용, 『장서각수집 교육·과거관련 고문서 해제(권1)』(장서각연구총서 2), 민속원, 2008.
  • 김경용, 「조선시대 과거제도 시행의 법규와 실제」, 『교육법학연구』 제16권 2호, 대한교육법학회, 2004.
  • 김경용, 「조선조의 과거제도와 교육제도」, 『대동한문학』 제40집, 대동문학회, 2014.
  • 김경용, 「조선중기 과거제도 정비과정과 그 교육적 의의」, 『교육사학연구』 제20집 1호 , 대한교육법학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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