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채(邸債)"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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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38 기준 최신판



지방군현이 자기 고을 출신의 경주인이나 영주인에게 진 빚.

개설

조선시대에 지방군현이 중앙과 감영 사이의 업무 처리 과정에서 경주인(京主人)이나 영주인(營主人)에게 진 빚 또는 지방군현이 지역민에게 진 빚을 저채라고 하였다. 지방관청은 지역민에게 식리전(殖利錢)이나 환곡(還穀)을 분급하여 그 이자로 저채를 상환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왕조는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이전의 제도를 계승하여 군현제를 실시하였다. 중앙-감영-군현으로 이어지는 위계질서 속에서 군현은 중앙·감영을 연결하는 연락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이에 중앙과의 연락 업무를 위하여 서울에 경주인을 두는 한편, 감영과의 연락 업무를 위하여 영주인(營主人)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수령을 비롯하여 관속들이 당해 지역의 경주인에게 빌려 쓴 금액이나 경저(京邸)에 숙박한 비용을 빨리 갚지 못하면 경저로부터 부채를 지는데, 이를 저채(邸債)라고 하였다(『순조실록』 11년 3월 30일).

영주인의 저채도 마찬가지였다. 각 읍의 진상이 감영에 오면 진상물은 반드시 영주인의 주선에 의하여 상납되었다. 한편 각 읍의 관속이 감영을 왕래할 때에는 대개 영주인의 집에서 취식하는데 그에 따른 비용 역시 바로 갚지 못하면 저채로 남았다. 그런가 하면 그들은 상당량의 미리 받은 공가(貢價)라든가 미리 거둔 조세를 수중에 가지고 있었다. 이를 입본전(立本錢)으로 삼아 높은 비율의 민간 고리대를 운영하거나 수령·관속에게 대여해 주기도 하였다.

변천

경주인·영주인은 각종 정보와 막대한 경제력을 토대로 수령이나 관속들이 두려워할 정도의 위세를 부렸다. 문제는 이들이 저채의 징수를 놓고 횡포를 부렸다는 데 있다. 수령·관속들은 상환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저채를 졌는데 무려 40,000냥에 이른 지역도 있었다. 경주인·영주인은 기간을 정해 놓고 높은 이자율로 저채를 징수하였는데, 제때에 갚지 못하면 원금 외에 이자에 이자가 붙어 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에 지방관청에서는 과도한 방법과 부당한 수법으로 저채를 상환하려고 하였고, 그 결과 농민들에게 원성을 살 수밖에 없었다(『철종실록』 13년 5월 30일). 저채 문제는 1862년 농민 항쟁의 중요한 폐정 개혁 대상이었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에도 저채의 폐단으로 인하여 영주인은 농민군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참고문헌

  • 『목민심서(牧民心書)』
  • 김동철, 『조선후기 공인연구』, 한국연구원, 1993.
  • 망원 한국사 연구실 19세기 농민항쟁분과 편, 『1862년 농민항쟁: 중세 말기 전국 농민들의 반봉건투쟁』, 동녘, 1988.
  • 장동표, 『조선 후기 지방재정 연구』, 국학자료원, 1999.
  • 이광린, 「경주인 연구」, 『인문과학』 7,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196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