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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대표표제=죽도|한글표제=죽도|한자표제=竹島|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임진왜란(壬辰倭亂), 통영(統營), 한산도(閑山島)|분야=정치/군사·국방/전쟁|유형=지명|지역=대한민국|시대=|왕대=|집필자=허지은|이칭=|관할지역=|형성시기=|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8251|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da_11312010_006 『세종실록』 13년 12월 10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906020_005 『선조실록』 29년 6월 20일]}}
  
경상북도 울릉군의 울릉읍 저동리에 위치한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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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통영시 한산면에 딸린 섬.
  
 
=='''개설'''==
 
=='''개설'''==
  
면적은 207,818㎡, 해발고도는 116m이다. 섬 둘레를 따라 도는 산책로는 약 4㎞ 길이이다. 울릉도 부속섬 44개(유인도 4, 무인도 40) 중 가장 큰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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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 128도 32분, 북위 34도 43분에 위치한다. 면적은 0.67㎢이고, 해안선 길이는 3.0㎞이다.
  
 
=='''명칭 유래'''==
 
=='''명칭 유래'''==
  
울릉도 개척 당시에 대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대나무가 많이 자라는 섬’이라는 뜻으로 댓섬·대나무섬·대섬이라고 불렀으며, 한자로는 죽도(竹島)로 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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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한산도(閑山島)에 본영을 둔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의 함선(艦船)들이 무기 제조에 필요한 대나무를 이곳에서 베어 사용하면서 죽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자연 환경'''==
 
=='''자연 환경'''==
  
직육면체 형상을 하고 있고, 상부는 수직에 가까운 절벽 위에 평평하게 수평을 이루며 사방은 해식으로 인한 절벽으로 여러 가지 형태의 기암괴석들로 둘러싸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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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은 동서 방향으로 길며, 타원형의 구릉성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최고 높이는 128m다. 북쪽 해안은 경사가 완만하고 수심이 얕아 선박이 쉽게 정박할 수 있다. 반면에 나머지 해안은 깎아 세운 듯한 해식애가 발달해 있으며, 수심은 30m에 이른다.
  
=='''형성 및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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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비정'''==
 
 
예전에는 죽서도(竹嶼島)라는 명칭으로 불리었고 고지도에서는 우산도(于山島)라고 표기되었다. 독도(獨島)와는 다른 섬이지만 일본에서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로 부르고, 이를 한국어식으로 읽으면 죽도가 되는 모호함 때문에 독도와 혼동되는 경우가 있다. 1693년(숙종 19) 봄에 울산의 어부 40여 명이 울릉도에 배를 대었는데, 일본인의 배가 와서 박어둔(朴於屯)·안용복(安龍福) 2명을 잡아갔다. 그해 겨울에 대마도에서 정관(正官) 귤진중(橘眞重)으로 하여금 박어둔 등을 거느려 보내게 하고는, 조선 사람이 죽도에서 고기 잡는 것을 금할 것을 청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sa_12002023_003 『숙종실록』 20년 2월 23일]).
 
 
 
1697년(숙종 23) 죽도 문제와 관련하여 비변사에서 회계한 내용 중에, “죽도는 바로 울릉도의 다른 이름이며, 조선의 땅으로 『동국여지승람』에 기재되어 있는 것을 일본에서도 분명하게 알고 있는데, 차왜(差倭)를 보내어 서계(書契)의 내용을 고쳐 달라고 청하니, 그간의 실정과 폐단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왜인들을 왕래하지 못하도록 금하는 것을 현재의 도주(島主)에게 공(功)을 돌리니, 인책(引責)하는 의도가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으나, 조정의 대체(大體)로 보아 지난 일을 다시 책망할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한 기록이 있다([http://sillok.history.go.kr/id/ksa_12302014_003 『숙종실록』 23년 2월 14일]).
 
  
=='''위치 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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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統營)에서 동남쪽으로 15㎞, 한산도에서 동남쪽으로 3㎞ 지점에 있다.
  
와다리(臥達理) 해변에서 2㎞, 저동항(苧洞港)에서 북동쪽으로 4㎞, 도동항(道洞港) 에서 7㎞ 떨어진 해상에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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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록'''==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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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1년(세종 13)에 죽도의 서쪽 바다에서 해적을 토벌한 제주 사람 천호(千戶)김석(金石) 등 8명에게 쌀을 내려주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312010_006 『세종실록』 13년 12월 10일]). 임진왜란 시기 일본군은 조선의 남부 해안 지역에 왜성을 쌓고 병력을 주둔시켜두었다. 죽도에는 일본군 제2군의 장수인 과도직무(鍋島直茂) 부자가 주둔하였다. 이들은 강화교섭 기간 중 다수의 일본군이 본국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전쟁 기간 내내 죽도에 주둔하였다. 정유재란이 발발하기 이전인 1596년(선조 29)에 조선 국왕이 대신과 비변사 당상(堂上)을 인견했을 때 죽도에 왜적이 가장 성한 것과 안골(安骨)·가덕(加德)·부산 등에도 영진(營陣)이 있는 것에 대해 묻고 이에 대해 유성룡(柳成龍)이 죽도에 왜적이 가장 많다고 답변한 기록이 있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2906020_005 『선조실록』 29년 6월 20일]).
*국토지리정보원, 『한국지명유래집(경상편)』, 2011.    
 
  
 
=='''관계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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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32 판



경상남도 통영시 한산면에 딸린 섬.

개설

동경 128도 32분, 북위 34도 43분에 위치한다. 면적은 0.67㎢이고, 해안선 길이는 3.0㎞이다.

명칭 유래

임진왜란 때 한산도(閑山島)에 본영을 둔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의 함선(艦船)들이 무기 제조에 필요한 대나무를 이곳에서 베어 사용하면서 죽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자연 환경

섬은 동서 방향으로 길며, 타원형의 구릉성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최고 높이는 128m다. 북쪽 해안은 경사가 완만하고 수심이 얕아 선박이 쉽게 정박할 수 있다. 반면에 나머지 해안은 깎아 세운 듯한 해식애가 발달해 있으며, 수심은 30m에 이른다.

위치 비정

통영(統營)에서 동남쪽으로 15㎞, 한산도에서 동남쪽으로 3㎞ 지점에 있다.

관련 기록

1431년(세종 13)에 죽도의 서쪽 바다에서 해적을 토벌한 제주 사람 천호(千戶)김석(金石) 등 8명에게 쌀을 내려주었다(『세종실록』 13년 12월 10일). 임진왜란 시기 일본군은 조선의 남부 해안 지역에 왜성을 쌓고 병력을 주둔시켜두었다. 죽도에는 일본군 제2군의 장수인 과도직무(鍋島直茂) 부자가 주둔하였다. 이들은 강화교섭 기간 중 다수의 일본군이 본국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전쟁 기간 내내 죽도에 주둔하였다. 정유재란이 발발하기 이전인 1596년(선조 29)에 조선 국왕이 대신과 비변사 당상(堂上)을 인견했을 때 죽도에 왜적이 가장 성한 것과 안골(安骨)·가덕(加德)·부산 등에도 영진(營陣)이 있는 것에 대해 묻고 이에 대해 유성룡(柳成龍)이 죽도에 왜적이 가장 많다고 답변한 기록이 있다(『선조실록』 29년 6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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