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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역|대표표제=주사|한글표제=주사|한자표제=主事|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육방주사(六房主事), 형방주사(刑房主事)|분야=정치/행정/관직·관품|유형=직역|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왕대=조선|집필자=이근호|제정시기=|폐지시기=1395년(태조 4)|소속관서=토관직(土官職)|관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8294|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da_12905012_003 『세종실록』 29년 5월 12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3001018_002 『세종실록』 30년 1월 18일],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207014_004 『세조실록』 2년 7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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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평안도와 함경도의 토관직으로 설치한 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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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고종 연간에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 등에 설치된 관직.
  
 
=='''개설'''==
 
=='''개설'''==
  
함경도나 평안도 등지에 설치된 토관직의 하나로 설치된 관직으로 인원은 정해져 있다. 또한 해당 인원 중 소수이지만 7품관으로 거관(去官)하기도 하였다. 지역 현안에 대한 검찰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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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고종 18) 통리기무아문에 처음 주사(主事)라는 관직이 설치된 이후 통리군국사무아문 등 여러 관서에 설치되었다. 사신의 파견이나 외국 사신의 접대 등을 담당하였다.
  
 
=='''담당 직무'''==
 
=='''담당 직무'''==
  
평안도와 함경도의 토관직으로 설치된 주사에는 각각의 임무가 앞에 붙어 형방주사(刑房主事) 혹은 육방(六房) 주사(主事) 등으로 불렸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905012_003 『세종실록』 29년 5월 12일]). 평양부의 경우 1448년에 인원을 조정하여 종전 89명에 1명을 추가하여 모두 90명으로 하고 매 30명당 1명은 7품으로 거관하게 하였다. 함흥부의 경우 종전 56명에서 4명을 추가하여 모두 60명으로 하고 매 30명당 1명씩 7품으로 거관하도록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3001018_002 『세종실록』 30년 1월 18일]). 이어 1449년에 함경도의 경성부(鏡城府)에, 1451년(문종 1)에 평안도의 의주목(義州牧)에, 1458년(세조 4)에 평안도의 영변부(寧邊府), 1465년(세조 11)에 개성부 등지에 토관직으로 역시 주사를 설치하였다. 토관의 주사직은 해당 지역 현안을 검찰하는 역할을 맡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0207014_004 『세조실록』 2년 7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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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연간에 주사가 처음 설치된 것은 1881년 1월 10일에 통리기무아문의 낭청을 주사와 부주사로 개편하면서부터이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1801010_001 『고종실록』 18년 1월 10일]). 이후에도 통리기무군국아문을 비롯해 친군위(親軍衛),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내무부(內務府) 등을 비롯해 1894년의 관제 개정 때에는 의정부에 31명이 설치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3106028_004 『고종실록』 31년 6월 28일]). 또한 1894년 7월에는 한성부 소속의 판관과 주부를 모두 주사로 개칭하였고([http://sillok.history.go.kr/id/kza_13107018_005 『고종실록』 31년 7월 18일]), 같은 해 7월에 이루어진 궁내부와 종정부, 종백부의 관제 정비 시에 궁내부에도 주사를 두었다. 하위 관서인 승선원이나 규장각 등에도 상서주사(尙瑞主事)·비서주사(秘書主事)·품계주사(品階主事)·도화주사(圖畵主事)·사자주사(寫字主事) 등의 이름을 띠고 주사가 설치되었다. 주사는 사신으로 차출되어 파견되거나 왕의 거둥 시에 수종으로 참여하였고, 종사관으로 차출되어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등 소속 관서의 실무 업무를 전담하였다.
  
 
=='''변천'''==
 
=='''변천'''==
  
함경도와 평안도 등지에 토관직으로 설치되었던 주사는 15세기 말 토관직이 소멸되면서 함께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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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리기무아문에 설치된 주사는 정원이 규정되지 않고 수시로 설치되어 운영되었기에 각종 위원(委員)이나 사사(司事)와 함께 불필요한 관직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2408015_002 『고종실록』 24년 8월 15일]). 그럼에도 주사는 폐지되지 않고 대한제국까지 존속되었다.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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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58 판



조선후기 고종 연간에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 등에 설치된 관직.

개설

1881년(고종 18) 통리기무아문에 처음 주사(主事)라는 관직이 설치된 이후 통리군국사무아문 등 여러 관서에 설치되었다. 사신의 파견이나 외국 사신의 접대 등을 담당하였다.

담당 직무

고종 연간에 주사가 처음 설치된 것은 1881년 1월 10일에 통리기무아문의 낭청을 주사와 부주사로 개편하면서부터이다(『고종실록』 18년 1월 10일). 이후에도 통리기무군국아문을 비롯해 친군위(親軍衛),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내무부(內務府) 등을 비롯해 1894년의 관제 개정 때에는 의정부에 31명이 설치되었다(『고종실록』 31년 6월 28일). 또한 1894년 7월에는 한성부 소속의 판관과 주부를 모두 주사로 개칭하였고(『고종실록』 31년 7월 18일), 같은 해 7월에 이루어진 궁내부와 종정부, 종백부의 관제 정비 시에 궁내부에도 주사를 두었다. 하위 관서인 승선원이나 규장각 등에도 상서주사(尙瑞主事)·비서주사(秘書主事)·품계주사(品階主事)·도화주사(圖畵主事)·사자주사(寫字主事) 등의 이름을 띠고 주사가 설치되었다. 주사는 사신으로 차출되어 파견되거나 왕의 거둥 시에 수종으로 참여하였고, 종사관으로 차출되어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등 소속 관서의 실무 업무를 전담하였다.

변천

통리기무아문에 설치된 주사는 정원이 규정되지 않고 수시로 설치되어 운영되었기에 각종 위원(委員)이나 사사(司事)와 함께 불필요한 관직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고종실록』 24년 8월 15일). 그럼에도 주사는 폐지되지 않고 대한제국까지 존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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