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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501년(연산군 7)에 시행한 생원시ㆍ진사시의 합격자 명부. | |
=='''개설'''== | =='''개설'''== | ||
− | + | 『사마방목(司馬榜目)』은 1501년(연산군 7)에 시행한 생원시ㆍ진사시의 합격자 명부다. 방목 내용을 보면, 주시관(主試官)으로는 일소(一所: 제1고시장)에 우참찬유순(柳洵), 호조참판김심(金諶), 이조정랑남곤(南袞) 등 6명이고, 이소(二所: 제2고시장)에는 대사헌성현(成俔) 등 6명이다. 시험 결과 생원시에는 이수정(李守貞)이 장원을 했고, 진사시 장원은 김안국(金安國)이 차지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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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사마방목에 수록된 인물 가운데 시험관인 남곤과 함께 진사 합격자 1등 중 한 명인 김안로(金安老)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후에 죄인이 된 관계로 모두 이름에 먹칠을 해 놓았는데, 이런 먹칠이 누구에 의해, 언제 이루어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김안로의 경우 뒷날 인종으로 즉위하는 동궁(東宮)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여러 차례 옥사를 일으켜, 정광필(鄭光弼)ㆍ이언적(李彦迪) 등을 유배 보내거나 사사하였으며, 중종 후궁인 경빈박씨와 그의 아들 복성군(福城君) 또한 죽음으로 몰았다가, 뒷날 역적으로 간주되어 사사(賜死)되었기 때문에, 그 이후 어느 때인가에 역적과 이름을 같이 올릴 수 없다 하여, 그 이름에다가 누군가 먹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 ||
=='''편찬/발간 경위'''== | =='''편찬/발간 경위'''== | ||
− | + | 이 책은 ‘홍치 14년 신유 사마방목’이라고도 하며, 당시 진사시험 합격자 중 한 명인 문의공(文毅公)김식(金湜, 1482∼1520)의 후손가에 전해지던 것이다. | |
− | + | =='''서지 사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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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초주갑인자본(初鑄甲寅字本)이다. 크기는 세로 29.3㎝, 가로 17.1㎝이다. 당시 예조에서 직접 간행해 반포한 이 방목은 조선 전기 과거제도 및 인물 관계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 |
− | + | 『홍치신유사마방목』은 보물 146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501년 간행된 유일본이다. 특히 권말에 후손 김성응의 보수 기록이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사마방목은 사마시의 합격자 명부로 조선시대 실시된 230회의 사마시 가운데 188회의 방목이 필사와 간본, 독립단행본과 문집ㆍ실기 편입, 당대와 후대 중간 등의 방식으로 전하고 있다. | |
− | + | 이외에도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소장 『사마방목』이 있으며, 90종 112책(필사본 25종, 간본 65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외에 1591년 목판본 『신묘년사마방목(辛卯年司馬榜目)』도 희귀 자료이다. 『사마방목』에는 합격자의 장서인과 장서기, 합격 후 인사한 사람들의 명단을 기록한 하문록(賀問錄)ㆍ영문록(榮問錄), 초시 합격자의 명단을 추기한 초시방목 등이 묵서되어 있어, 사마시와 사마방목 간행, 사마시 관련 제반 정보들을 제공해 주는 방목 연구의 중요한 참고자료가 된다. | |
− | + |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에 있는 하협(河悏)의 종택에 보관되어 있는 『사마방목』도 있다. 이 사마방목(司馬榜目)은 조선시대 사마시(司馬試) 급제자의 명부이며, 3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사마방목(만력무자)』은 1588년 있었던 사마시의 합격자 명부의 초본이다. 두 번째 『경자사마방목』은 하달한(1624∼1660)이 1660년(현종 1) 식년시의 진사 3등 제21인에 합격한 방목이며, 목활자본이다. 세 번째 『숭정삼경술증광사마방목』은 1790년(정조 14)에 시행된 증광시 진사 3등 제35인에 합격한 하진백(河鎭伯)의 방목이며, 금속활자본이다. | |
=='''구성/내용'''== | =='''구성/내용'''== | ||
− | + | 사마시 합격은 당시 양반으로 인정받는 가장 객관적인 절차였으며, 합격자는 대과, 음서의 방식으로 관직에 진출하거나 향촌 사회의 주도 계층으로 역할을 수행하며 조선을 실제 경영한 집단의 공통분모라고 할 수 있다. 방목에는 그러한 합격자와 관련한 객관적인 인물 정보가 수록되어 있는 중요한 문헌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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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사마방목은 합격증인 백패와 함께 정부에서 간행하여 배포하는 일종의 기념품일 뿐만 아니라, 합격자가 관직을 이용하거나, 합격자의 비용 분담을 통하여, 간행하는 경우, 국가에서 간행하고, 그 비용을 합격자가 납부하는 경우, 원래의 방목이 유실되었거나 이를 염려한 후손들이 중간하는 유형도 많이 나타난다. 특히 조선 후기 방목에서 간기와 함께 등장하는 ‘은문고직(恩門庫直)’은 방목의 편성, 간행과 직접 관련이 있는 직업군이며, 1678년 방목부터 나타나고 있다. | |
− | + | 어떤 연구에서는 『사마방목』에서 생원ㆍ진사 합격자 중에는 양자(養子)도 많은데, 양자는 15세기 후반에 처음 나타나며, 16세기 후반부터 19세기말까지 지속적으로 보이고 있음을 알아냈다. 지역적으로는 서울과 경상도가 높은데, 이는 주자학과 주자가례의 정착과정을 반영하고 있다. 입양절차와 관련해서는 장자는 거의 양자로 삼지 않았으며, 생양가 부모가 모두 생존하였을 때 입양을 하는 등 전반적으로 『경국대전』이 준수되었다. 부모는 문반이 많고 문반은 문반끼리, 무반은 무반끼리 입양을 한 경우가 많다. 전반적으로 양부보다는 생부의 지위가 높은데, 이는 조선후기와는 다른 점으로 조선전기의 특징이다. 통계적으로 16세기까지 입양은 미미하였다. 16세기 후반부터는 변화하여, 지역적으로는 서울에서 지방으로, 대읍에서 소읍으로 확산되었다. 때로는 종가와 가계계승을 중시하여 법과 예를 무시하고 장자를 입양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적으로나 심성적으로 입양과 가계계승이 중요하게 인식됨을 반영한다. 이러한 변화에서 16세기말에 종법적 가족질서가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에서 16세기 후반은 불교적 사회에서 유교적 사회로 전이하는 과도기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런 결과를 도출한 것은 『사마방목』의 기록이 나타내고 있는,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 |
=='''참고문헌'''== | =='''참고문헌'''== | ||
− | * | + | *이융조, 「역사 사마방목을 통해서 본 16,17,18세기의 양반사회 분석」,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67. |
− | * | + | *정긍식, 「16세기 양자의 특징- 『사마방목(司馬榜目)』의 분석」, 『국제지역연구』 제12권 4호,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연구센터, 2003. |
+ | *최경훈, 「동산도서관 소장 사마방목의 현황과 가치」, 『한국학논집』 제59집,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5. | ||
+ | *최진옥, 「15세기 사마방목의 분석」, 『청계사학』 제5집, 한국학중앙연구원, 1988. | ||
=='''관계망'''== | =='''관계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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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20 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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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사마방목 |
한글표제 | 사마방목 |
한자표제 | 司馬榜目 |
분야 | 명부서 |
유형 | 한문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연산군 |
집필자 | 성낙수 |
간행처 | |
간행년일 | 1501 |
권책수 | 1책 |
사용활자 | 초주갑인자본(初鑄甲寅字本) |
소장처 | 계명대학교 도서관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사마방목(司馬榜目) |
1501년(연산군 7)에 시행한 생원시ㆍ진사시의 합격자 명부.
개설
『사마방목(司馬榜目)』은 1501년(연산군 7)에 시행한 생원시ㆍ진사시의 합격자 명부다. 방목 내용을 보면, 주시관(主試官)으로는 일소(一所: 제1고시장)에 우참찬유순(柳洵), 호조참판김심(金諶), 이조정랑남곤(南袞) 등 6명이고, 이소(二所: 제2고시장)에는 대사헌성현(成俔) 등 6명이다. 시험 결과 생원시에는 이수정(李守貞)이 장원을 했고, 진사시 장원은 김안국(金安國)이 차지하였다.
이 사마방목에 수록된 인물 가운데 시험관인 남곤과 함께 진사 합격자 1등 중 한 명인 김안로(金安老)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후에 죄인이 된 관계로 모두 이름에 먹칠을 해 놓았는데, 이런 먹칠이 누구에 의해, 언제 이루어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김안로의 경우 뒷날 인종으로 즉위하는 동궁(東宮)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여러 차례 옥사를 일으켜, 정광필(鄭光弼)ㆍ이언적(李彦迪) 등을 유배 보내거나 사사하였으며, 중종 후궁인 경빈박씨와 그의 아들 복성군(福城君) 또한 죽음으로 몰았다가, 뒷날 역적으로 간주되어 사사(賜死)되었기 때문에, 그 이후 어느 때인가에 역적과 이름을 같이 올릴 수 없다 하여, 그 이름에다가 누군가 먹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편찬/발간 경위
이 책은 ‘홍치 14년 신유 사마방목’이라고도 하며, 당시 진사시험 합격자 중 한 명인 문의공(文毅公)김식(金湜, 1482∼1520)의 후손가에 전해지던 것이다.
서지 사항
1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초주갑인자본(初鑄甲寅字本)이다. 크기는 세로 29.3㎝, 가로 17.1㎝이다. 당시 예조에서 직접 간행해 반포한 이 방목은 조선 전기 과거제도 및 인물 관계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홍치신유사마방목』은 보물 146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501년 간행된 유일본이다. 특히 권말에 후손 김성응의 보수 기록이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사마방목은 사마시의 합격자 명부로 조선시대 실시된 230회의 사마시 가운데 188회의 방목이 필사와 간본, 독립단행본과 문집ㆍ실기 편입, 당대와 후대 중간 등의 방식으로 전하고 있다.
이외에도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소장 『사마방목』이 있으며, 90종 112책(필사본 25종, 간본 65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외에 1591년 목판본 『신묘년사마방목(辛卯年司馬榜目)』도 희귀 자료이다. 『사마방목』에는 합격자의 장서인과 장서기, 합격 후 인사한 사람들의 명단을 기록한 하문록(賀問錄)ㆍ영문록(榮問錄), 초시 합격자의 명단을 추기한 초시방목 등이 묵서되어 있어, 사마시와 사마방목 간행, 사마시 관련 제반 정보들을 제공해 주는 방목 연구의 중요한 참고자료가 된다.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에 있는 하협(河悏)의 종택에 보관되어 있는 『사마방목』도 있다. 이 사마방목(司馬榜目)은 조선시대 사마시(司馬試) 급제자의 명부이며, 3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사마방목(만력무자)』은 1588년 있었던 사마시의 합격자 명부의 초본이다. 두 번째 『경자사마방목』은 하달한(1624∼1660)이 1660년(현종 1) 식년시의 진사 3등 제21인에 합격한 방목이며, 목활자본이다. 세 번째 『숭정삼경술증광사마방목』은 1790년(정조 14)에 시행된 증광시 진사 3등 제35인에 합격한 하진백(河鎭伯)의 방목이며, 금속활자본이다.
구성/내용
사마시 합격은 당시 양반으로 인정받는 가장 객관적인 절차였으며, 합격자는 대과, 음서의 방식으로 관직에 진출하거나 향촌 사회의 주도 계층으로 역할을 수행하며 조선을 실제 경영한 집단의 공통분모라고 할 수 있다. 방목에는 그러한 합격자와 관련한 객관적인 인물 정보가 수록되어 있는 중요한 문헌이다.
사마방목은 합격증인 백패와 함께 정부에서 간행하여 배포하는 일종의 기념품일 뿐만 아니라, 합격자가 관직을 이용하거나, 합격자의 비용 분담을 통하여, 간행하는 경우, 국가에서 간행하고, 그 비용을 합격자가 납부하는 경우, 원래의 방목이 유실되었거나 이를 염려한 후손들이 중간하는 유형도 많이 나타난다. 특히 조선 후기 방목에서 간기와 함께 등장하는 ‘은문고직(恩門庫直)’은 방목의 편성, 간행과 직접 관련이 있는 직업군이며, 1678년 방목부터 나타나고 있다.
어떤 연구에서는 『사마방목』에서 생원ㆍ진사 합격자 중에는 양자(養子)도 많은데, 양자는 15세기 후반에 처음 나타나며, 16세기 후반부터 19세기말까지 지속적으로 보이고 있음을 알아냈다. 지역적으로는 서울과 경상도가 높은데, 이는 주자학과 주자가례의 정착과정을 반영하고 있다. 입양절차와 관련해서는 장자는 거의 양자로 삼지 않았으며, 생양가 부모가 모두 생존하였을 때 입양을 하는 등 전반적으로 『경국대전』이 준수되었다. 부모는 문반이 많고 문반은 문반끼리, 무반은 무반끼리 입양을 한 경우가 많다. 전반적으로 양부보다는 생부의 지위가 높은데, 이는 조선후기와는 다른 점으로 조선전기의 특징이다. 통계적으로 16세기까지 입양은 미미하였다. 16세기 후반부터는 변화하여, 지역적으로는 서울에서 지방으로, 대읍에서 소읍으로 확산되었다. 때로는 종가와 가계계승을 중시하여 법과 예를 무시하고 장자를 입양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적으로나 심성적으로 입양과 가계계승이 중요하게 인식됨을 반영한다. 이러한 변화에서 16세기말에 종법적 가족질서가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에서 16세기 후반은 불교적 사회에서 유교적 사회로 전이하는 과도기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런 결과를 도출한 것은 『사마방목』의 기록이 나타내고 있는,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참고문헌
- 이융조, 「역사 사마방목을 통해서 본 16,17,18세기의 양반사회 분석」,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67.
- 정긍식, 「16세기 양자의 특징- 『사마방목(司馬榜目)』의 분석」, 『국제지역연구』 제12권 4호,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연구센터, 2003.
- 최경훈, 「동산도서관 소장 사마방목의 현황과 가치」, 『한국학논집』 제59집,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5.
- 최진옥, 「15세기 사마방목의 분석」, 『청계사학』 제5집, 한국학중앙연구원,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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