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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의 합장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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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효종과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의 .
  
 
=='''개설'''==
 
=='''개설'''==
  
영릉은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능으로, 합장릉의 형식으로 조성된 조선 최초의 왕릉이다. 세종은 먼저 승하한 소헌왕후의 능을 조성하면서, 나중에 자신도 함께 안치될 수 있도록 미리 수릉(壽陵)을 만들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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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이다. 8세 되던 해인 1626년(인조 4)에 봉림대군(鳳林大君)에 봉해졌으며, 병자호란 이후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함께 심양에서 인질 생활을 했다. 그 뒤 소현세자가 귀국 후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재위 10년 만인 1659년(효종 10) 5월 4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여, 10월 29일에 건원릉(健元陵) 서쪽의 영릉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불과 10여 년 만인 1673년(현종 14)에, 석물에 틈이 생겨 봉분 안으로 빗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다는 이유로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의 동쪽으로 천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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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의 비인 인선왕후는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의 딸이다. 1631년(인조 9)에 봉림대군과 가례를 올리고 풍안부부인(豊安府夫人)에 봉해졌으며, 1649년(효종 즉위)에 효종이 즉위하면서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후 효종의 능인 영릉을 여주로 천장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1674년(현종 15) 2월 24일에 경덕궁 회상전에서 승하하였다. 그해 6월 4일, 유언에 따라 효종의 능침 아래쪽에 안장되었다[『현종실록』 15년 6월 4일].
  
 
=='''조성 경위'''==
 
=='''조성 경위'''==
  
1446년(세종 28)에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태종과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능인 [[헌릉(獻陵)]]의 서쪽 기슭에 영릉을 조성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805005_002 『세종실록』 28년 5월 5일]). 영릉은 조선시대 왕릉 가운데 최초로 합장릉의 형식으로 조성했는데, 봉분 아래에 두 개의 석실을 만들고 그중 동쪽에 소헌왕후를 안장하였다. 그리고 서쪽에는 나중에 세종이 승하하면 안치할 수 있도록, 왕이 살아 있을 때 미리 마련해 두는 무덤인 수릉을 두었다. 수릉을 이용한 합장릉의 형식은 이후 [[장릉(章陵)]], [[융릉(隆陵)]], [[건릉(健陵)]], [[인릉(仁陵)]] 등에도 사용되었는데, 특히 조선후기의 왕릉에서 많이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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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9년에 효종이 승하하자,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을 국상을 주관하는 총호사(摠護使)로 임명하였다. 장지로는 세종의 영릉이 있는 여주의 홍제동(弘濟洞), 건원릉 경내의 첫 번째 언덕, 수원 등이 후보에 올랐다. 두루 살핀 끝에 수원으로 결정하고 산릉 조성 공사를 시작했으나,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송시열(宋時烈)이 건원릉 주변을 다시 살펴볼 것을 제안하였다. 여주는 멀고, 수원은 군사 요충지이므로 능을 두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송시열의 주장이 있은 이후 수원에 능을 조성하는 것을 반대하는 상소가 끊이지 않자, 현종은 할 수 없이 건원릉 안 건좌(乾坐)의 언덕을 산릉지(山陵址)로 삼도록 하였다[『현종실록』 즉위년 6월 3일][『현종실록』 즉위 7월 11일 5번째기사]. 정자각과 재실의 규모는 인조의 능인 장릉(長陵)의 제도를 따르도록 하였고, 석물은 건원릉을 참고하였다. 수원부에서 이미 만들기 시작한 석물은 승군을 투입해 운반했으며, 그해 10월 29일에 공사를 마쳤다.
  
이후 세조 연간에 영릉의 터가 좋지 않으므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대두되었으나, 서거정(徐居正)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468년(예종 즉위) 예종은 영릉을 천장할 편부를 의논하게 하고 1469년(예종 1)에 천장하였다. 이때 세조가 원릉의 석실이 유해무익(有害無益)하다 하여 유명으로 석실과 사대석을 쓰지 말라고 하였기에 영릉 또한 [[광릉(光陵)]]의 제도를 따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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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영릉은 조성 이후 매년 수리를 해도 계속 병풍석의 틈이 벌어지고, 물이 고였다. 이에 영림부령(靈林副令) 이익수(李翼秀)가 능을 봉심한 뒤 상소를 올려, 능침을 개봉(改封)하거나 천릉할 것을 제안하였다. 결국 1673년(현종 14) 5월 5일에 천장을 결정하고, 10월 7일 여주 홍제동에 자리한 세종의 영릉 동쪽으로 천장하였다. 총호사는 우의정 김수흥(金壽興)이 맡았다. 이때 새 영릉의 석물은 세조의 능인 광릉(光陵)의 제도를 따르되, 세종의 능과 같은 산 안에 있으므로 영릉(英陵)의 석물을 참고하도록 하였다[『현종실록』 14년 6월 12일][『현종실록』 14년 6월 20일].
  
 
=='''조성 상황'''==
 
=='''조성 상황'''==
  
옛 영릉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따라 조성된 능으로, 조선시대 전기 능제(陵制)의 기본이 되었다. 다만 능의 석물은 병석(屛石) 가운데 영저(靈杵), 영탁(靈鐸), [[지초(芝草)]] 문양을 배제하고 구름 문양과 십이지신상만 조각하였으며, [[혼유석(魂遊石)]]의 고석(鼓石)을 5개에서 4개로 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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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병풍석을 둘렀으나, 여주로 천장한 뒤에는 난간석만 설치하였다. 상설(象設) 제도는 3계로 나누어, 상계에는 곡장 안에 망주석 2개, 혼유석 1개, 호석(虎石)과 양석(羊石) 4개를 배치하였다. 중계에는 문인석 1쌍과 마석(馬石) 2개, 장명등 1개를, 하계에는 무인석 1쌍과 마석 2개를 배치하였다. 병풍석을 세우지 않는 전통은 세조의 광릉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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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성종의 능인 선릉(宣陵)을 조성할 때부터 다시 설치하기 시작했으나, 영릉을 천장하면서 다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인선왕후의 능에는 곡장만 없을 뿐, 다른 의물의 배치는 효종의 능과 똑같다. 능원 아래에는 정자각·비각·홍살문·재실이 있고,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는 금천(禁川)이 흐른다. 영릉에는 왕과 왕비의 능이 좌우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위아래로 배치되어 있다. 이는 풍수지리상 길게 뻗어 내린 언덕의 위, 아래에 각각 생기가 왕성한 정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릉은 이와 같이 위아래 형태로 조성된 조선 최초의 왕릉이다.
1469년에 여주군으로 자리를 옮긴 영릉은 세조의 유명(遺命)에 따라 병풍석과 석실을 두지 않고, 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지는 회격릉(灰隔陵)으로 조성하였다. 『능원지(陵園誌)』에 따르면, 능 아래 35보(步) 거리에 정자각이 있었으며, 정자각 서쪽 8보 지점에는 수라청(水刺廳)이, 동쪽 8보 지점에는 수복방(守僕房)이 있었다. 망료위(望燎位)는 정자각 서북쪽 15보 거리에 세워졌으며, 홍살문은 안향청(安香廳)에서 252보 거리에 건립되었다. 또한 오늘날 주차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자리에 연지(蓮池)가 조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춘관통고(春官通考)』에는 홍살문 남쪽에 하나, 재실 앞 동남쪽 13보 거리에 또 하나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지의 규모는 길이 12보, 폭 11보이다. 안향청은 3칸이며, 재실은 6칸으로 전사청 앞에 있었다.
 
  
 
=='''변천'''==
 
=='''변천'''==
  
합장릉은 대개 하나의 봉분 아래에 두 개의 현실(玄室)을 만들어 동쪽에는 왕후를, 서쪽에는 왕을 안치하는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영릉의 경우 소헌왕후가 세종보다 먼저 승하하였으므로 동쪽에 왕후를 안치하고, 서쪽은 뒷날 세종을 안치하기 위해 수릉으로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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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4년에 현종이 승하하자, 산릉 터를 건원릉 안 옛 영릉의 남서쪽으로 정하였다. 이는 영릉에 사용했던 석물을 다시 이용하도록 하여, 산릉 공역에 따른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 주려는 의도에서였다[『숙종실록』 즉위년 9월 15일].
  
옛 영릉의 석실 구조는 『세종실록』「오례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먼저 광중에 설치하는 지석(支石)은 석실을 축조하는 데 기초가 되는 부재(部材)로,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에서는 길이는 1자 5치, 높이는 1자로 하되, 너비는 상황에 맞추어 적당히 사용하도록 규정하였다. 지석 위에는 [[동망(銅網)]]을 놓았는데, 양실(兩室)에 하나씩 두었다. 또 양쪽에 [[방석(旁石)]]을 설치했는데, 합장릉인 까닭에 단릉이나 쌍릉의 경우보다 약 2배나 컸다. 북우석(北隅石)은 단릉과 쌍릉의 경우 하나만 사용했으나, 영릉과 같은 동봉이석실에서는 두 개의 부재로 나누어 설치하였다. 그밖에 문비석과 문역석, 문의석 등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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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3년(숙종 29)에는 영릉의 정자각을 중건하면서 비각을 새로 건립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세종의 영릉을 조성할 때부터 필요성이 없다는 이유로 표석을 세우지 않았는데, 효종의 능을 천릉하면서 송시열의 건의에 따라 다시 세우게 되었다. 이때는 표석만 설치하고 비각은 세우지 않았다가 나중에 건립한 것이다.
 
 
1469년에 여주로 천릉할 때는 병풍석과 석실을 두지 않고, 회격릉으로 조성하였다. 이후 단종의 장릉(莊陵)부터 세조의 [[광릉(光陵)]], 예종의 [[창릉(昌陵)]], 성종의 [[선릉(宣陵)]], 중종의 [[정릉(靖陵)]]에 이르기까지 여러 능이 이와 같은 회격릉으로 축조되었다. 그러나 회격릉의 제도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며, 다만 『주자가례(朱子家禮)』, 『증보사례편람(增補四禮便覽)』,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등에 단편적인 설명이 있을 뿐이다.
 
 
 
조선시대 왕릉의 부속 건물은 일반적으로 외금천교, 외연지, 재실, 지당, 금천교, 홍살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선원보감(璿源寶鑑)』에 따르면 영릉의 경우에도 능역 입구 밖에 외연지가 있었으나, 현재는 자취를 찾을 수 없다.
 
  
 
=='''관련 사항'''==
 
=='''관련 사항'''==
  
세종 연간에는 『주자가례』를 비롯해 각종 유교 의례를 정비하였다. 특히 예치주의를 표방한 조선에서는 제례를 가장 중요한 의례로 인식하였으며, 건국 이후부터 세종대까지 정비된 예제를 『세종실록』「오례의」를 통해 일차적으로 집대성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유교 이념과 의례를 바탕으로 궁궐을 비롯한 종묘, 문묘, 왕릉 등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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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한 뒤 비어 있던 옛 영릉 자리에는 영조의 능인 원릉(元陵)이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맨 처음 영릉의 제일 후보지로 낙점되었던 수원의 산릉지에는 정조대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인 현륭원(顯隆園)이 조성되었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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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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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능원지(陵園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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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숭릉]산릉도감의궤([顯宗崇陵]山陵都監儀軌)』
*『선원보감(璿源寶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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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영릉]산릉도감의궤([孝宗寧陵]山陵都監儀軌)』
*『영릉보토소등록(英陵補土所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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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영릉천봉]산릉도감의궤([孝宗寧陵遷奉]山陵都監儀軌)』  
*『주자가례(朱子家禮)』    
 
*『증보사례편람(增補四禮便覽)』     
 
*『춘관통고(春官通考)』     
 
*목을수, 『고려·조선능지』, 문성당, 1991.     
 
*은광준, 『조선왕릉석물지 상편』, 민속원, 1985.     
 
*은광준, 『조선왕릉석물지 하편』, 민속원, 1992.     
 
*김상협, 「조선 왕릉 석실 및 능상구조의 변천에 관한 연구」, 명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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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11일 (일) 23:36 기준 최신판



조선 효종과 비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의 능.

개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이다. 8세 되던 해인 1626년(인조 4)에 봉림대군(鳳林大君)에 봉해졌으며, 병자호란 이후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함께 심양에서 인질 생활을 했다. 그 뒤 소현세자가 귀국 후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재위 10년 만인 1659년(효종 10) 5월 4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여, 10월 29일에 건원릉(健元陵) 서쪽의 영릉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불과 10여 년 만인 1673년(현종 14)에, 석물에 틈이 생겨 봉분 안으로 빗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다는 이유로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의 동쪽으로 천장하였다.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는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의 딸이다. 1631년(인조 9)에 봉림대군과 가례를 올리고 풍안부부인(豊安府夫人)에 봉해졌으며, 1649년(효종 즉위)에 효종이 즉위하면서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후 효종의 능인 영릉을 여주로 천장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1674년(현종 15) 2월 24일에 경덕궁 회상전에서 승하하였다. 그해 6월 4일, 유언에 따라 효종의 능침 아래쪽에 안장되었다[『현종실록』 15년 6월 4일].

조성 경위

1659년에 효종이 승하하자,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을 국상을 주관하는 총호사(摠護使)로 임명하였다. 장지로는 세종의 영릉이 있는 여주의 홍제동(弘濟洞), 건원릉 경내의 첫 번째 언덕, 수원 등이 후보에 올랐다. 두루 살핀 끝에 수원으로 결정하고 산릉 조성 공사를 시작했으나,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송시열(宋時烈)이 건원릉 주변을 다시 살펴볼 것을 제안하였다. 여주는 멀고, 수원은 군사 요충지이므로 능을 두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송시열의 주장이 있은 이후 수원에 능을 조성하는 것을 반대하는 상소가 끊이지 않자, 현종은 할 수 없이 건원릉 안 건좌(乾坐)의 언덕을 산릉지(山陵址)로 삼도록 하였다[『현종실록』 즉위년 6월 3일][『현종실록』 즉위 7월 11일 5번째기사]. 정자각과 재실의 규모는 인조의 능인 장릉(長陵)의 제도를 따르도록 하였고, 석물은 건원릉을 참고하였다. 수원부에서 이미 만들기 시작한 석물은 승군을 투입해 운반했으며, 그해 10월 29일에 공사를 마쳤다.

그런데 영릉은 조성 이후 매년 수리를 해도 계속 병풍석의 틈이 벌어지고, 물이 고였다. 이에 영림부령(靈林副令) 이익수(李翼秀)가 능을 봉심한 뒤 상소를 올려, 능침을 개봉(改封)하거나 천릉할 것을 제안하였다. 결국 1673년(현종 14) 5월 5일에 천장을 결정하고, 10월 7일 여주 홍제동에 자리한 세종의 영릉 동쪽으로 천장하였다. 총호사는 우의정 김수흥(金壽興)이 맡았다. 이때 새 영릉의 석물은 세조의 능인 광릉(光陵)의 제도를 따르되, 세종의 능과 같은 산 안에 있으므로 영릉(英陵)의 석물을 참고하도록 하였다[『현종실록』 14년 6월 12일][『현종실록』 14년 6월 20일].

조성 상황

처음에는 병풍석을 둘렀으나, 여주로 천장한 뒤에는 난간석만 설치하였다. 상설(象設) 제도는 3계로 나누어, 상계에는 곡장 안에 망주석 2개, 혼유석 1개, 호석(虎石)과 양석(羊石) 4개를 배치하였다. 중계에는 문인석 1쌍과 마석(馬石) 2개, 장명등 1개를, 하계에는 무인석 1쌍과 마석 2개를 배치하였다. 병풍석을 세우지 않는 전통은 세조의 광릉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성종의 능인 선릉(宣陵)을 조성할 때부터 다시 설치하기 시작했으나, 영릉을 천장하면서 다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인선왕후의 능에는 곡장만 없을 뿐, 다른 의물의 배치는 효종의 능과 똑같다. 능원 아래에는 정자각·비각·홍살문·재실이 있고,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는 금천(禁川)이 흐른다. 영릉에는 왕과 왕비의 능이 좌우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위아래로 배치되어 있다. 이는 풍수지리상 길게 뻗어 내린 언덕의 위, 아래에 각각 생기가 왕성한 정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릉은 이와 같이 위아래 형태로 조성된 조선 최초의 왕릉이다.

변천

1674년에 현종이 승하하자, 산릉 터를 건원릉 안 옛 영릉의 남서쪽으로 정하였다. 이는 영릉에 사용했던 석물을 다시 이용하도록 하여, 산릉 공역에 따른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 주려는 의도에서였다[『숙종실록』 즉위년 9월 15일].

1703년(숙종 29)에는 영릉의 정자각을 중건하면서 비각을 새로 건립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세종의 영릉을 조성할 때부터 필요성이 없다는 이유로 표석을 세우지 않았는데, 효종의 능을 천릉하면서 송시열의 건의에 따라 다시 세우게 되었다. 이때는 표석만 설치하고 비각은 세우지 않았다가 나중에 건립한 것이다.

관련 사항

천장한 뒤 비어 있던 옛 영릉 자리에는 영조의 능인 원릉(元陵)이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맨 처음 영릉의 제일 후보지로 낙점되었던 수원의 산릉지에는 정조대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인 현륭원(顯隆園)이 조성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현종숭릉]산릉도감의궤([顯宗崇陵]山陵都監儀軌)』
  • 『[효종영릉]산릉도감의궤([孝宗寧陵]山陵都監儀軌)』
  • 『[효종영릉천봉]산릉도감의궤([孝宗寧陵遷奉]山陵都監儀軌)』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