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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 =='''총론'''== | ||
− | [?~? = ?]. 조선 3대 왕인 태종(太宗)의 후궁.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영가군(永嘉君)에 봉해진 권홍(權弘)이며, 어머니 월성 이씨( | + | [?~? = ?]. 조선 3대 왕인 태종(太宗)의 후궁.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영가군(永嘉君)에 봉해진 권홍(權弘)이며, 어머니 월성 이씨(月城李氏)는 이학림(李學林)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검교 참찬문하부사(檢校參贊門下府事)를 지낸 권균(權鈞)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권보(權溥)이다. |
=='''태종의 후궁'''== | =='''태종의 후궁'''== | ||
− | 권의빈(權懿嬪)은 아버지 권홍(權弘)과 이학림( | + | 권의빈(權懿嬪)은 아버지 권홍(權弘)과 이학림(李學林)의 딸인 어머니 월성 이씨(月城李氏)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권의빈은 태종이 후궁제도를 법제화 한 후에 공식적으로 들인 후궁이다. 1402년(태종 2) 태종은 전 성균악정(成均樂正)권홍의 딸을 궁에 들이기 위해 권홍에게 비단 등을 내려 주어 가례(嘉禮)의 혼수(婚需)를 갖추도록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ca_10201021_002 『태종실록(太宗實錄)』 2년 1월 21일]) 이때 태종은 권의빈이 현행(賢行)이 있다 하여 예(禮)를 갖추어 맞아들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비(正妃)인 원경왕후(元敬王后)가 투기를 심하게 부리며 울기를 그치지 않고 음식도 먹지 않는 등 심하게 반대를 하였고, 결국 태종은 가례색(嘉禮色)을 파한 후 환관(宦官)과 시녀(侍女) 각각 몇 사람만으로 권의빈을 별궁(別宮)에서 맞아들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ca_10203007_003 『태종실록』 2년 3월 7일]) 당시 원경왕후는 태종과 함께 국가를 세웠음에도 태종이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다시 혼인을 하려고 한다는 점을 문제로 삼았다. 또 이미 많은 후궁들이 있는 상태였으므로 원경왕후의 반대는 거욱 극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권의빈은 혼인 한 달 후 정의궁주(貞懿宮主)에 봉해졌고,([http://sillok.history.go.kr/id/kca_10204018_001 『태종실록』 2년 4월 18일]) 아버지인 권홍은 가정대부(嘉靖大夫) 영가군(永嘉君)이 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ca_10204028_001 『태종실록』 2년 4월 28일]) |
권의빈은 정식 절차를 밟아 궁에 들어왔으므로, 태종의 총애뿐만 아니라 상당한 지위도 확보했던 것으로 보인다. 권의빈의 아버지 권홍이 당시 국구(國舅)로서 대접을 받았다는 점에서 이러한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태종이 권의빈을 위해 대궐 북쪽에 연못과 누각을 마련해주고,([http://sillok.history.go.kr/id/kca_10208013_002 『태종실록』 2년 8월 13일]) 사신인 권파파(權婆婆)가 준 금(錦), 단(段), 침(針), 분(粉), 주머니(囊)를 권의빈에게 주는 등 권의빈을 매우 총애하였기 때문이다.([http://sillok.history.go.kr/id/kca_11707025_001 『태종실록』 17년 7월 25일]),([http://sillok.history.go.kr/id/kca_11801005_002 『태종실록』 18년 1월 5일]) | 권의빈은 정식 절차를 밟아 궁에 들어왔으므로, 태종의 총애뿐만 아니라 상당한 지위도 확보했던 것으로 보인다. 권의빈의 아버지 권홍이 당시 국구(國舅)로서 대접을 받았다는 점에서 이러한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태종이 권의빈을 위해 대궐 북쪽에 연못과 누각을 마련해주고,([http://sillok.history.go.kr/id/kca_10208013_002 『태종실록』 2년 8월 13일]) 사신인 권파파(權婆婆)가 준 금(錦), 단(段), 침(針), 분(粉), 주머니(囊)를 권의빈에게 주는 등 권의빈을 매우 총애하였기 때문이다.([http://sillok.history.go.kr/id/kca_11707025_001 『태종실록』 17년 7월 25일]),([http://sillok.history.go.kr/id/kca_11801005_002 『태종실록』 18년 1월 5일]) |
2018년 1월 9일 (화) 22:54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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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의빈권씨 |
한글표제 | 의빈권씨 |
한자표제 | 懿嬪權氏 |
분야 | 인물 |
유형 | 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 |
집필자 | 정주영 |
봉작 | 의빈(懿嬪) |
출신 | 왕족 |
성별 | 여자 |
본관 | 안동(安東)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반정리 741 |
증조부 | 권보(權溥) |
조부 | 권균(權鈞) |
부 | 권홍(權弘) |
모_외조 | 월성 이씨(月城李氏) : 이학림(李學林)의 딸 |
처_장인 | (남편)태종(太宗) →(자녀)1녀 |
자녀 | (1녀)정혜옹주(貞惠翁主)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의빈권씨(懿嬪權氏)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太宗實錄)』 2년 1월 21일, 『태종실록』 2년 3월 7일, 『태종실록』 2년 4월 18일, 『태종실록』 2년 4월 28일, 『태종실록』 2년 8월 13일, 『태종실록』 17년 7월 25일, 『태종실록』 18년 1월 5일, 『세종실록(世宗實錄)』 4년 2월 20일, 『세종실록』 4년 5월 10일, 『세종실록』 4년 5월 20일, 『세종실록』 23년 12월 9일, 『단종실록(端宗實錄)』 1년 6월 26일, 『단종실록』 1년 5월 3일, 『단종실록』 1년 5월 3일, 『단종실록』 1년 6월 26일, 『세조실록(世祖實錄)』 1년 윤6월 11일, 『세조실록』 3년 5월 22일, 『세종실록』 1년 1월 22일, 『세종실록』 1년 1월 24일, 『세종실록』 6년 10월 6일 |
총론
[?~? = ?]. 조선 3대 왕인 태종(太宗)의 후궁.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영가군(永嘉君)에 봉해진 권홍(權弘)이며, 어머니 월성 이씨(月城李氏)는 이학림(李學林)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검교 참찬문하부사(檢校參贊門下府事)를 지낸 권균(權鈞)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권보(權溥)이다.
태종의 후궁
권의빈(權懿嬪)은 아버지 권홍(權弘)과 이학림(李學林)의 딸인 어머니 월성 이씨(月城李氏)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권의빈은 태종이 후궁제도를 법제화 한 후에 공식적으로 들인 후궁이다. 1402년(태종 2) 태종은 전 성균악정(成均樂正)권홍의 딸을 궁에 들이기 위해 권홍에게 비단 등을 내려 주어 가례(嘉禮)의 혼수(婚需)를 갖추도록 하였다.(『태종실록(太宗實錄)』 2년 1월 21일) 이때 태종은 권의빈이 현행(賢行)이 있다 하여 예(禮)를 갖추어 맞아들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비(正妃)인 원경왕후(元敬王后)가 투기를 심하게 부리며 울기를 그치지 않고 음식도 먹지 않는 등 심하게 반대를 하였고, 결국 태종은 가례색(嘉禮色)을 파한 후 환관(宦官)과 시녀(侍女) 각각 몇 사람만으로 권의빈을 별궁(別宮)에서 맞아들였다.(『태종실록』 2년 3월 7일) 당시 원경왕후는 태종과 함께 국가를 세웠음에도 태종이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다시 혼인을 하려고 한다는 점을 문제로 삼았다. 또 이미 많은 후궁들이 있는 상태였으므로 원경왕후의 반대는 거욱 극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권의빈은 혼인 한 달 후 정의궁주(貞懿宮主)에 봉해졌고,(『태종실록』 2년 4월 18일) 아버지인 권홍은 가정대부(嘉靖大夫) 영가군(永嘉君)이 되었다.(『태종실록』 2년 4월 28일)
권의빈은 정식 절차를 밟아 궁에 들어왔으므로, 태종의 총애뿐만 아니라 상당한 지위도 확보했던 것으로 보인다. 권의빈의 아버지 권홍이 당시 국구(國舅)로서 대접을 받았다는 점에서 이러한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태종이 권의빈을 위해 대궐 북쪽에 연못과 누각을 마련해주고,(『태종실록』 2년 8월 13일) 사신인 권파파(權婆婆)가 준 금(錦), 단(段), 침(針), 분(粉), 주머니(囊)를 권의빈에게 주는 등 권의빈을 매우 총애하였기 때문이다.(『태종실록』 17년 7월 25일),(『태종실록』 18년 1월 5일)
태종이 태상왕이 된 후 병에 걸리자 권의빈은 극진하게 태종을 간호하였고, 이에 태종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정의궁주에서 의빈(懿嬪)으로 진봉되었다.(『세종실록(世宗實錄)』 4년 2월 20일) 1422년(세종 4) 태종이 세상을 떠나자,(『세종실록』 4년 5월 10일) 권의빈은 세종에게 말도 하지 않고 신신녕궁주(辛愼寧宮主)와 함께 머리를 깎은 후 여승이 되어 밤낮으로 불경을 외우며 태종의 명복을 빌었다.(『세종실록』 4년 5월 20일) 당시 조선은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펼쳤는데, 궁 안에서 불법(佛法)이 행해지자 중추원(中樞院) 지사(知事)정인지(鄭麟趾)가 상소를 올렸다. 이때 정인지는 불교가 숭상되는 것에 대한 우려와 함께 권의빈을 옛 모습으로 돌아오게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세종실록』 23년 12월 9일)
이후 권의빈은 세종의 여섯 째 아들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을 맡아 양육하였다.(『단종실록(端宗實錄)』 1년 6월 26일) 그런 가운데 1453년(단종 1) 70세의 권의빈은 병환으로인해 질병가(疾病家)로 거처를 옮겨 치료를 하였다.(『단종실록』 1년 5월 3일) 이에 금성대군은 권의빈이 거처하는 곳이 비루하고 습기가 찼다며 자신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서 병을 치료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였는데,(『단종실록』 1년 5월 3일) 단종(端宗)은 대신들과의 의논 끝에 세종 대에 이미 궁녀가 나가서 거처하는 것을 금지하였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단종실록』 1년 6월 26일) 결국 권의빈은 세종의 후궁인 양혜빈(楊惠嬪)의 궁으로 거처를 옮겨서 살았다.(『세조실록(世祖實錄)』 1년 윤6월 11일) 한편 1457년(세조 3) 세조는 선왕의 후궁인 권의빈이 거처하는 궁의 이름을 의빈궁(懿嬪宮)에서 영수궁(寧壽宮)으로 고쳤으며, 권의빈은 이곳에서 노후를 보냈다.(『세조실록』 3년 5월 22일)
묘소와 후손
권의빈(權懿嬪)의 무덤은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반정리 741에 있다.
권의빈은 태종과의 사이에서 1녀를 낳았는데, 바로 태종의 서장녀인 정혜옹주(貞惠翁主)이다. 정혜옹주는 찬성(贊成)박신(朴信)의 아들인 박종우(朴從愚)와 결혼하였으며,(『세종실록』 1년 1월 22일) 이에 옹주는 정혜옹주(貞惠翁主)에 봉해졌고, 부마인 박종우는 자헌대부(資憲大夫) 운성군(雲城君)이 되었다.(『세종실록』 1년 1월 24일) 정혜옹주는 결혼한 지 5년 만에 세상을 떠났으며, 슬하에 자녀는 없다.(『세종실록』 6년 10월 6일)
참고문헌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이미선, 「조선 초기의 후궁」, 『사학연구』96, 2009.
- 지두환, 『태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