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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동면(東面) 진간리(眞干里) 포계(抱癸)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낙전당(樂全堂)신익성(申翊聖)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있다.[비문] |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동면(東面) 진간리(眞干里) 포계(抱癸)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낙전당(樂全堂)신익성(申翊聖)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있다.[비문] | ||
− | 부인 여흥민씨(驪興閔氏)는 판관(判官)민철명(閔哲命)의 딸인데, 자녀는 3남을 낳았다. 장남 이복생( | + | 부인 여흥민씨(驪興閔氏)는 판관(判官)민철명(閔哲命)의 딸인데, 자녀는 3남을 낳았다. 장남 이복생(李復生)은 군수(郡守)를 지냈고, 차남 이경생(李更生)은 청도 군수(淸道郡守)를 지냈으며, 3남 이재생(李再生)은 일찍 요절하였다.[비문] 부인 민씨(閔氏)는 사대부집 부인의 행실이 있었다. 민씨는 남편 이수(李綏)가 돌아간 뒤, 30여 년 동안 미망인(未亡人)으로서 자손을 키우며 검소하게 81세까지 살았는데, 절개가 높다는 칭송을 받았다.[비문] |
=='''참고문헌'''== | =='''참고문헌'''== |
2018년 1월 9일 (화) 22:57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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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이수 |
한글표제 | 이수 |
한자표제 | 李綏 |
분야 | 인물 |
유형 | 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 |
집필자 | 최양규 |
자 | 수지(綏之) |
봉작 | 남계군(南溪君)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48년(명종 3) |
사망 | 1601년(선조 34) |
본관 | 전주(全州)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양주(楊州) 동면(東面) 진간리(眞干里) 포계(抱癸)의 선영(先塋) |
증조부 | 이순(李詢) |
조부 | 이의(李禕) |
부 | 이담령(李聃齡) |
모_외조 | 해평윤씨(海平尹氏) |
처_장인 | 여흥민씨(驪興閔氏) 민철명(閔哲命)의 딸 →(자녀) 3남 |
자녀 | (1자)이복생(李復生) (2자)이경생(李更生) (3자)이재생(李再生) (서출 1남)이진하(李振夏)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이수(李綏)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실록』 22년 12월 29일, 『선조실록』 29년 6월 11일, 『선조실록』 31년 10월 13일, 『선조실록』 33년 8월 10일 |
총론
[1548년(명종 3)∼1601년(선조 34) = 54세].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고부군수(古阜郡守)이고, 봉작(封爵)은 평난 공신(平難功臣) 2등으로 남계군(南溪君)에 봉해졌다. 자(字)는 수지(綏之)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사과(副司果)이담령(李聃齡)이고, 어머니 해평 윤씨(海平尹氏)는 윤사종(尹嗣宗)의 딸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76년(선조 9) 사마시(司馬試)의 생원과(生員科)와 진사과(進士科)에 동시에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9세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그 후, 오랫동안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다가, 성균관의 추천을 받아 선원전(璿源殿) 참봉(參奉)에 보임되었고, 전례에 따라 봉사(奉事)·직장(直長)·주부(主簿)로 전임되었다. 이어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사어(司禦)와 사복시(司僕寺) 판관(判官)등을 역임한 후, 외직으로 나가 태인(泰仁)·단양(丹陽)·고양(高陽)·삭녕(朔寧)의 군수를 지냈다.[비문]
1589년(선조 22) 정여립 모반사건을 조정에 고변한 공을 인정받아, 이듬해에 평난 공신(平難功臣) 2등 남계군(南溪君)에 봉해졌다.(『선조실록』 22년 12월 29일) 1596년(선조 29) 봉산 군수(鳳山郡守)로 재임할 당시, 공무(公務)를 아랫사람에게 전담시키고, 백성들의 소장(訴狀)도 제대로 살펴 처리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왕래하는 중국군에게 물품을 공급하는 일 조차 돌보지 않았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선조실록』 29년 6월 11일) 1598년(선조 31) 부평 부사(富平府使)에 발탁되었으나, 이수가 이전에 수령의 직임을 맡았을 때 별다른 명성이 없었을 뿐 아니라, 경력도 얼마 되지 않다는 이유로 사간원에서 반대하면서 체임되었다.(『선조실록』 31년 10월 13일) 1600년 (선조 33) 고부 군수(古阜郡守)로 재임할 당시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였는데, 그의 나이 53세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곧 이어 홍문록(弘文錄)에도 녹선(錄選)되었으나, 선조는 선발된 31명의 인원이 너무 많을 뿐 아니라, 반드시 문학적 재능을 갖춘 사람을 뽑아야한다며 이조(吏曹)로 하여금 재론하도록 하면서, 이수는 탈락되고 말았는데, 결국 병을 얻어 이듬해인 1601년(선조 34) 정월, 세상을 떠났다.(『선조실록』 33년 8월 10일)
성품과 일화
타고난 품성이 온화하고 후덕하였으며, 몸가짐을 조심하고, 행실을 가다듬었다.
집에서 지낼 때나 벼슬에 재임할 때, 모두 법도에 맞게 행동하였으며, 남들과 사이좋게 교제하였다. 또한 바둑을 두고 술잔을 나누며 담소(談笑)를 주고받을 때 피곤해 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러므로 어진 사람이거나 어질지 못한 사람이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그를 좋아하여, 친근하게 지내고자 하였는데, 특히 어진 사람들과 뜻이 잘 맞았다. 이수는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여 불우하게 지내다가, 만년에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아갔으나 크게 영달(榮達)하지 못하고 그 다음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가 돌아가자, 많은 사우(士友)들이 상가에 찾아와 조문(弔問)하였는데,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한창 출세하려고 하던 때에 그가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하여 몹시 안타까워하였다.[비문]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동면(東面) 진간리(眞干里) 포계(抱癸)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낙전당(樂全堂)신익성(申翊聖)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있다.[비문]
부인 여흥민씨(驪興閔氏)는 판관(判官)민철명(閔哲命)의 딸인데, 자녀는 3남을 낳았다. 장남 이복생(李復生)은 군수(郡守)를 지냈고, 차남 이경생(李更生)은 청도 군수(淸道郡守)를 지냈으며, 3남 이재생(李再生)은 일찍 요절하였다.[비문] 부인 민씨(閔氏)는 사대부집 부인의 행실이 있었다. 민씨는 남편 이수(李綏)가 돌아간 뒤, 30여 년 동안 미망인(未亡人)으로서 자손을 키우며 검소하게 81세까지 살았는데, 절개가 높다는 칭송을 받았다.[비문]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낙전당집(樂全堂集)』
- 『기축록(己丑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태천집(苔泉集)』
- 『식암선생유고(息庵先生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