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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용어|대표표제=청룡사|한글표제=청룡사|한자표제=靑龍寺|대역어=|상위어=원당(願堂)|하위어=|동의어=|관련어=보각국사혼수(普覺國師混修), 정순(正恂), 재궁(齋宮), 허적(許積)|분야=문화/종교/불교|유형=개념용어|지역=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시대=|왕대=|집필자=이종수|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4469|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da_10406021_003 『세종실록』 4년 6월 21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805013_003 『세종실록』 8년 5월 13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810003_003 『세종실록』 8년 10월 3일],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907015_004 『광해군일기(중초본)』 9년 7월 15일], [http://sillok.history.go.kr/id/ksa_10607015_004 『숙종실록』 6년 7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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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용어|대표표제=청룡사|한글표제=청룡사|한자표제=靑龍寺|대역어=|상위어=원당(願堂)|하위어=|동의어=대장암(大藏庵)|관련어=공양왕진영(恭讓王眞影), 인평대군(麟坪大君), 나준(羅浚), 사당(舍堂)|분야=문화/종교/불교|유형=개념용어|지역=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서운산|시대=|왕대=|집필자=이종수|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5270|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da_11907017_004 『세종실록』 19년 7월 17일]}}
  
조선후기에 양천허씨의 원당이었던 사찰로,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에 위치한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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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의 원당으로, 경기도 안성시서운산에 위치한 절.
  
 
=='''개설'''==
 
=='''개설'''==
  
청룡사는 고려말 보각 국사혼수가 주석했으며 그의 탑비가 지금도 남아 있다. 조선 태종이 승하하자 후궁이었던 신녕궁주가 명복을 빌기 위해 『법화경』을 사경하였는데 이때 세종이 청룡사에서 사경하는 도구들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양천(陽川)허씨의 원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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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사(靑龍寺)는 고려 원종대에 창건되어 대장암으로 불렸는데, 나옹 화상이 중건하고 청룡사로 고쳐 불렀다. 청룡사에 공양왕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었는데, 세종이 공양왕 무덤 곁의 암자로 이안하였다. 인조의 아들 인평대군이 자신의 원당으로 삼았다.
  
=='''내용 및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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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및 변천'''==
  
 
(1) 창건
 
(1) 창건
  
청룡사의 창건과 관련한 기록이 없어서 알지 못하지만 고려말의 고승 보각(普覺) 국사(國師)혼수(混修)가 주석하였고 그의 탑비가 현재도 남아 있는 것으로 보면 규모가 매우 큰 절이었을 것이다. 혼수는 12세에 어머니의 권유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22세에 승과(僧科)에 급제하였으며, 29세 때에는 금강산으로 들어가 2년간 수행하였다. 1370년(고려 공민왕 19)에 나옹 화상이 주관하는 공부선장(工夫選場)에 참석하여 단독으로 선발되었으나 도망쳐 은거하였다. 그 후 왕명에 의해 여러 사찰의 주지가 되었고 1383년(고려 우왕 9)에 국사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1392년에 청룡사로 거처를 옮긴 후 그곳에서 73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태조이성계가 보각 국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비를 세우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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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성시서운산에 소재한 청룡사는 1720년(숙종 46)에 나준(羅浚)이 지은 「안성서운산청룡사중수사적비(安城瑞雲山靑龍寺重修事蹟碑)」에 그 내력이 전해져 온다. 그에 의하면, 청룡사는 1265년(고려 원종 6)에 명본(明本) 국사(國師)가 창건하여 대장암(大藏庵)이라 불렀는데, 그로부터 약 100년 후 1364년(고려 공민왕 13)에 나옹(懶翁) 화상이 꽃비가 내리고 용이 오르는 것을 보고, 산 이름을 서운산이라 부르고 절 이름을 청룡사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2) 조선시대
 
(2) 조선시대
  
태종이 승하하자 후궁이었던 신녕궁주(愼寧宮主)가 태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법화경』을 사경하였는데, 세종이 [[나인(內人)]]으로 하여금 [[의발(衣鉢)]]과 등롱(燈籠) 만드는 것을 감독하여 사경하는 도구들을 준비하도록 하고, 또 승려 정순(正恂)에게 청룡사(靑龍寺)에서 그 일을 맡아보도록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0406021_003 『세종실록』 4년 6월 21일]). 그리고 효령대군의 가신(家臣)들이 청룡사의 전지를 부당하게 빼앗으려 하여 승려들이 관아에 고소하였는데도 수령이 처벌하지 않자 세종이 그 소식을 듣고 수령을 처벌하라고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0805013_003 『세종실록』 8년 5월 13일]). 이에 사헌부에서 조사하여 사건의 전말을 왕에게 보고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0810003_003 『세종실록』 8년 10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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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사에는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의 진영(眞影)이 봉안되어 있었는데 세종이 이를 고양현(高陽縣)의 공양왕 무덤 곁에 있는 암자로 이안(移安)하라고 명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907017_004 『세종실록』 19년 7월 17일]).
  
광해군대에는 1617년(광해군 9)에 김자점(金自點)이 부친의 묘를 청룡사 앞산으로 이장하려 하자 왕이 청룡사는 조종조(祖宗朝)의 [[내원당(內願堂)]]이고 허잠(許潛) 역시 훈신(勳臣)으로서 서운산에 묘소가 있으므로 불가하다고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oa_10907015_004 『광해군일기(중초본)』 9년 7월 15일]). 청룡사가 있는 서운산은 양천(陽川)허씨의 선산이었기 때문이다. 허잠은 양천허씨로서 숙종대에 영의정을 지냈던 허적(許積)의 조상인데 숙종대에 청룡사가 허적의 선산 [[재궁(齋宮)]]이라고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sa_10607015_004 『숙종실록』 6년 7월 15일]). 청룡사와 양천허씨의 갈등도 있어서 정조대에 허묘(許昴)의 종이 염병을 앓자 청룡사에 가서 머물도록 하였는데, 청룡사 승려들이 받아들이지 않자 허묘가 승려 치윤(致允)을 묶고 구타하여 6일 만에 죽게 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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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이르러 광해군은 전답 50결과 절에 필요한 물품들을 청룡사에 하사하였다. 또한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麟坪大君)은 청룡사를 원당으로 삼았는데, 대웅전 뒷산에 자리한 인평대군의 후손인 완천군(完川君)묘를 통해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당시 청룡사가 왕실과 매우 밀접하게 교류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청룡사 터에 남아 있는 유물로는 청룡사 보각국사정혜원융탑(普覺國師定慧圓融塔), 청룡사 보각국사정혜원융탑전사자석등, 청룡사 보각국사정혜원융탑비 등이 있다. 이외에도 적운당(跡雲堂) 사리탑과 청룡사 위전비(位田碑) 등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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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청룡사 문화재 가운데 시왕상[十王像]은 1669년(현종 10), 대종(大鍾)은 1674년(현종 15)에, 감로왕 불화는 1687년(숙종 13)에 조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17세기에는 건물 중수 등의 큰 불사보다는 불상이나 불화 등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청룡사에 큰 불사가 있었던 때는 1720년(숙종 46)이었다. 청룡사 승려 사간(思侃)이 중심이 되어 대웅전, 관음전, 문수전 등을 중수하였는데, 당시의 중수 사실이 앞에서 언급한 사적비에 적혀 있다. 시주자 가운데 남자 신도를 의미하는 [[거사(居士)]]와 여자 신도를 의미하는 사당(舍堂)의 이름이 많이 등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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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이후 청룡사는 쇠락하였던 것 같다. 설월낭주(雪月浪鑄)가 쓴 「청룡사대법당수보문(靑龍寺大法堂修補文)」에 의하면, 절이 황폐하여 대웅전만 남아 있는데 그나마 기둥이 부식되고 처마는 내려앉을 정도여서 영월천학(泳月天鶴)이 공덕주가 되어 1821년(순조 21)에 수리하였으며, 1878년(고종 23)에 대웅전 삼존상을 개금하고 불화를 조성하였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심리록(審理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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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문화연구원, 『경기도Ⅰ』, 사찰문화연구원 출판국, 1993.      
*「충주청룡사보각국사환암정혜원융탑비(忠州靑龍寺普覺國師幻庵定慧圓融塔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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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봉건, 「전통목조건축의 천연덕스러운 가구미-안성 청룡사 대웅전」, 『건축』42, 대한건축학회, 1998.      
*정영호, 「중원 청룡사지의 조사 : 보각국사 정혜원 융탑과 탑비 및 석등을 중심하여」, 『사총』, 고려대학교 사학회,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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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정, 「조선후기 안성 청룡사의 佛事 후원자 연구」, 『지방사와 지방문화』13, 2010.       
  
 
=='''관계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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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문화]][[분류:종교]][[분류:불교]][[분류:개념용어]][[분류: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서운산]]

2017년 12월 10일 (일) 02:44 판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의 원당으로, 경기도 안성시서운산에 위치한 절.

개설

청룡사(靑龍寺)는 고려 원종대에 창건되어 대장암으로 불렸는데, 나옹 화상이 중건하고 청룡사로 고쳐 불렀다. 청룡사에 공양왕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었는데, 세종이 공양왕 무덤 곁의 암자로 이안하였다. 인조의 아들 인평대군이 자신의 원당으로 삼았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경기도 안성시서운산에 소재한 청룡사는 1720년(숙종 46)에 나준(羅浚)이 지은 「안성서운산청룡사중수사적비(安城瑞雲山靑龍寺重修事蹟碑)」에 그 내력이 전해져 온다. 그에 의하면, 청룡사는 1265년(고려 원종 6)에 명본(明本) 국사(國師)가 창건하여 대장암(大藏庵)이라 불렀는데, 그로부터 약 100년 후 1364년(고려 공민왕 13)에 나옹(懶翁) 화상이 꽃비가 내리고 용이 오르는 것을 보고, 산 이름을 서운산이라 부르고 절 이름을 청룡사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2) 조선시대

청룡사에는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의 진영(眞影)이 봉안되어 있었는데 세종이 이를 고양현(高陽縣)의 공양왕 무덤 곁에 있는 암자로 이안(移安)하라고 명하였다(『세종실록』 19년 7월 17일).

조선후기에 이르러 광해군은 전답 50결과 절에 필요한 물품들을 청룡사에 하사하였다. 또한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麟坪大君)은 청룡사를 원당으로 삼았는데, 대웅전 뒷산에 자리한 인평대군의 후손인 완천군(完川君)의 묘를 통해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당시 청룡사가 왕실과 매우 밀접하게 교류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존하는 청룡사 문화재 가운데 시왕상[十王像]은 1669년(현종 10)에, 대종(大鍾)은 1674년(현종 15)에, 감로왕 불화는 1687년(숙종 13)에 조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17세기에는 건물 중수 등의 큰 불사보다는 불상이나 불화 등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청룡사에 큰 불사가 있었던 때는 1720년(숙종 46)이었다. 청룡사 승려 사간(思侃)이 중심이 되어 대웅전, 관음전, 문수전 등을 중수하였는데, 당시의 중수 사실이 앞에서 언급한 사적비에 적혀 있다. 시주자 가운데 남자 신도를 의미하는 거사(居士)와 여자 신도를 의미하는 사당(舍堂)의 이름이 많이 등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후 청룡사는 쇠락하였던 것 같다. 설월낭주(雪月浪鑄)가 쓴 「청룡사대법당수보문(靑龍寺大法堂修補文)」에 의하면, 절이 황폐하여 대웅전만 남아 있는데 그나마 기둥이 부식되고 처마는 내려앉을 정도여서 영월천학(泳月天鶴)이 공덕주가 되어 1821년(순조 21)에 수리하였으며, 1878년(고종 23)에 대웅전 삼존상을 개금하고 불화를 조성하였다.

참고문헌

  • 사찰문화연구원, 『경기도Ⅰ』, 사찰문화연구원 출판국, 1993.
  • 금봉건, 「전통목조건축의 천연덕스러운 가구미-안성 청룡사 대웅전」, 『건축』42, 대한건축학회, 1998.
  • 황현정, 「조선후기 안성 청룡사의 佛事 후원자 연구」, 『지방사와 지방문화』13,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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